정당성 잃은 인용은 곧 표절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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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3면

장편소설『내가 누구인지…』가 표절이라는 평론가 이성욱씨의 주장에 작가 이인화씨는 기존의 여러 작품을 짜깁기해 전혀 새로운 작품을 만든「혼성모방」이란 새 기법을 취했다 고 반박했다(중앙일보15, 18일자 13면 보도·일부지방16, 19일자).이 같은 작가 이씨의 주장에 대해 평론가 이성욱씨가 반론을 보내왔다.【편집자주】
이인화씨는 그의 표절행위를 비판한 나의 평론에 대해 일종의 「반론」을 제시했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그의「반론」은 자신에 대한 변론에 가까울 뿐이지 어떤 객관적 설득력도 가지고 있다고는 보기 어렵다.
그의「반론」 요지는「경직된 관행」으로는 자신의「새로운 기법」을 해석할 수 없다는 이야기다.
그러나 사실 어떤 관행이 본연의 노릇을 못할 경우 그것은 단지 관행이라는「원죄」때문에 그런 것이 아니라 그것이 더 이상 당대적 타당성을 가지지 못한다는 객관적 평결이 가해질 때 그렇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이씨는 그 관행이 자신의 작품을 평가하는데 왜 온당치 못한가에 대한 언급은 없고 다만 그것이 관행이기에 자신의 작품을 평가할 수 없다는 주장이다. 따라서 여기에는 관행과자신의 기법(표절)사이의 관계에 대해서는 아무 말도 안한 것이나 마찬가지다.
이런 맥락에서 나는 이씨의 강변에도 불구하고 예의 그「경직된 관행」으로 이씨의 작품이 왜 표절인가를 가려보겠다.
미학에서 기존 작품의 이미지나 형식을 빌려와 자신의 작품원료로 삼는 것을 통상 차용·인용이라 한다. 차용은 그대표적인 예다. 그러나 차용에는 정당한 절차와 방법이 수반되어야 하는데 그것은 누가 보더라도 알 수 있는 형식과 내용의「공공연함과 명백한 의도성」이다.
한데 이씨의 작품에는 이런 정당한 절차가 전혀 없다. 다만 기존작품의 여러 부분들을 여기저기에 베껴 놓았을 뿐이다. 또 그 베끼는 수법과 양은 놀라울 정도다. 따라서 우리는 이씨의 방법을 차용이 아니라 표절 혹은 도용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
한편 이씨는 현실에 대한작가의 인식과 재현이 불가하기에 기존 작품을 베끼는 방법이 정당화된다고 하는데 만약 그렇다 하더라도 그건 작가 개인의 사정이지 그런 판단에 대한 검증과정 없이 그것이 곧바로 표절행위를 용납해주는 알리바이가 된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그러면 가령 누군가가 백 가지의 기존 작품에서 백 개의 장면을 베껴와 합성모방 해 놓더라도 그것 역시 비평적 시비의 대상이 될 수 없다는 논리로 발전하게 된다.
사태가 그렇다면 우리는 수 없는 절차탁마와 피땀의 노고로 이루어진 성실한 창작과 표절사이에 어떤 구분을 둘수 있으며, 예술에서 그 어떤 진정 성을 찾을 수 있단 말인가. 이는 예술 이전에 도덕과 양심의 문제다.
또 다른 측면을 보자.
이씨의 주장에 따르자면 그의 작품은 표절이 아니라 대단히 혁신적인 기법을 실험한 작품이 된다. 따라서 그의 작품에 대한 평가에는 당연히 형식에 대한 지적이 부각되어야 옳다.
그러나 그의 작품에 대한심사위원의 선정소감 중 형식에 관한 이야기는 어디에도 없다. 사실이 이렇다면 이씨 작품의 수상근거에 심각한 의문이 제기되는 것이다. 과연 심사위원들은 형식적 특징하나 제대로 보지 못하는 청맹과니인가.
이상의 측면에서 다시금 나는 이씨의 작품이 명백한 표절이라고 강조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본래 나의 평론이 목표로 했던 것은 표절문제라 기보다는 치열한 문학적 모색이나 깊이 대신 남의 작품을 베껴 쓰는 이씨나 몇몇 젊은 작가들의 안이한 문학방법을 비판하고자 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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