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협 과소비 누구 책임인가(사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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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1990년 9월 한소수교를 전후해서 우리는 대소경협자금 30억달러가 북방정책의 정치·외교적 성과를 사기위한 수단이 되어서는 안된다는 점을 누차 강조한 바 있다. 당시 서방 선진국들은 구소련의 장래에 대한 불확실성을 이유로 적극적인 경협을 꺼리고 있었기 때문에 정부의 그같은 결정은 경제적 이해를 도외시한 것이라는 비판이 있었다.
이러한 우려는 독립국가연합(CIS)이 구소련에 이미 빌려준 14억2천만달러에 대한 이자를 약정기일내에 지급할 수 없다는 뜻을 최근 우리나라 관련 은행측에 통보해옴으로써 현실화되었다. 이로써 정부의 대소 경협전략에 대한 대폭적인 수정은 불가피하게 됐다. 또한 그동안의 경협 진행 과정과 앞으로의 대응에 관한 정부의 납득할만한 설명이 없으면 국민세금을 무책임하게 해외에 뿌린다는 엄중한 비판을 면할 길이 없다.
대소경협자금은 원래 차주를 소련의 대외경제은행으로 하고 상환을 소련연방정부가 보증했다. 그러나 소련 붕괴후 이 은행마저 CIS내부에서 법적지위가 모호하게 됨에 따라 누가 돈을 빌려갔는지,또 누가 보증할 것인지 그 주체가 모두 실종되고 말았다.
러시아공화국은 작년에 소연방의 채무에 대해서도 합법적 승계자가 될 용의가 있음을 여러차례 천명했으나 올들어서는 태도를 돌변했다. CIS내 공화국들간에서 뿐 아니라 러시아정부 안에서도 한국이 제공한 차관 상환방법에 관한 의견 조정에 실패해 결국 이자지급 불능을 통보하기에 이르렀다.
국제수지가 크게 악화되고 있는 가운데 정부가 구소련에 거액의 자금을 제공했던 것은 나름대로 거대한 시장에 발판을 굳히기 위한 진입비용으로 생각했는지 모른다. 그러나 CIS에 진출했거나 합작사업을 계획했던 기업들이 거의 대부분 빈손으로 돌아왔다. 선진 7개국들도 CIS에 대한 경협을 돌다리 두드리듯 따지고 있는 터에 한국은 너무 많은 위험을 너무 쉽게 부담했으며 CIS의 차관보증 승계문제에 대한 외교교섭 능력도 발휘하지 못했다.
정부는 앞으로 대 러시아 차관문제에 대해 전문적인 의견수렴을 거쳐 신중하게 정책을 결정하기 바란다. 구소련의 급박한 상황변화도 정확히 인식하지 못한채 성급하게 덤벼든데 대한 철저한 반성과 책임추궁도 있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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