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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추억] 신현확 전 국무총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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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3면

1979년 12월 국무총리에 임명된 신현확 총리(左)가 최규하 대통령과 시국 현안에 대해 논의하고 있다.

1979년 10월 26일 밤.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이 박정희 대통령을 암살한 뒤 국방부 장관실에서 국무위원들을 호출했다. 신현확 전 총리는 당시 부총리였다. 김재규는 국무위원들에게 "당장 비상계엄을 선포해야 한다"고 으름장을 놓았다. 그러나 신 부총리는 "비상계엄을 선포하려면 이유가 있어야 하오. 그 이유를 알기 전엔 비상계엄을 의결할 수 없소"라고 맞섰다.

권력을 쥐고 있던 중앙정보부장이 비상계엄을 선포하라고 우격다짐할 때 신 부총리는 중앙정보부장에게 호통을 쳤다.

결국 김재규 부장은 "박 대통령이 운명했다"고 말했다. 신 부총리는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내가 직접 대통령이 사망한 것을 보지 않고선 비상계엄을 선포할 수 없다"며 박 대통령의 시신이 안치된 병원으로 달려갔다. 박 대통령 유고를 확인한 뒤에야 그는 비상계엄 선포에 동의했다.

26일 세상을 뜬 신현확 전 국무총리는 질곡의 현대사에서 기개를 지킨 대쪽 관료였다.

고인은 대구고보(현 경북고) 동창인 김준성 전 총리, 정수창 전 대한상의 회장 등과 함께 경북고 인맥의 대부로 불린다.

해방 후 고인은 장택상 전 국무총리의 추천으로 51년 상공부 공업국 공정과장으로 관계에 발을 디뎠다. 전후 폐허가 된 국가의 재건에 앞장선 그는 59년 39세의 나이로 부흥부 장관에 임명됐다. 그러나 4.19혁명 이후 3.15 부정선거에 관련됐다는 혐의로 구속됐다. 이에 대해 고인은 훗날 "일반 국무위원들은 부정선거를 몰랐다"며 "굳이 책임을 묻는다면 국무위원으로서의 도의적 책임이 있을 뿐"이라고 말했다.

1978년 12월 부총리 겸 경제기획원 장관에 임명된 신현확(左)씨가 전임 남덕우 부총리와 악수하고 있다.

2년7개월간의 옥살이를 마친 고인은 쌍용양회 사장을 거쳐 73년 공화당 공천으로 고향에서 출마, 9대 국회에 진출했다.

고인은 박정희 대통령의 눈에 띄어 75년 보건사회부(현 보건복지부) 장관으로 행정부로 돌아왔다. 그는 당시 의료보험(현 건강보험)을 도입해 국내 의료복지 체계의 큰 틀을 만들었다.

78년 12월 고인은 부총리 겸 경제기획원 장관으로 발탁됐다. 고인은 물가안정을 최우선 목표로 삼는 경제 안정화 정책을 마련했다. 79년 전 세계를 덮친 오일쇼크를 한국이 견뎌낼 수 있었던 것은 고인의 물가안정 정책 덕이었다는 게 후세의 평가다.

79년 10.26과 12.12 사태로 신군부가 등장했을 때 그는 원칙을 버리지 않았다. 79년 12월 6일 통일주체국민회의에서 뽑힌 최규하 대통령은 나흘 뒤 신현확 부총리를 국무총리로 임명했다. 하지만 12.12로 전두환 보안사령관이 권력을 장악하자 그와 신군부 간 갈등이 시작됐다.

권력을 쥔 전두환 보안사령관은 중앙정보부장 자리를 탐냈다. 정보를 완전 독점해 모든 권력을 장악하겠다는 계산이었다. 신 총리는 민간인이 중앙정보부장을 맡아야 한다고 맞섰다. 그러나 최 대통령은 전두환 보안사령관의 요구를 결국 받아들이고 만다. 이런 사실은 95년 검찰의 12.12 수사과정에서 밝혀졌다.

전두환 측은 80년 5월 17일 비상계엄 전국 확대, 국회 해산,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 설치 등을 최 대통령과 국무위원들에게 강요해 관철시켰다. 이때도 고인은 국회 해산과 국보위 설치 등은 안 된다며 신군부와 계속 대립각을 세웠다. 고인은 그날 심야 국무회의를 마친 후 즉각 사표를 내고 정.관계를 떠났다.

고인은 86~91년 삼성물산 회장 겸 삼성미술문화재단 이사장을 역임했고, 99년부터 2002년까지 박정희 대통령 기념사업회 회장을 맡았다. 전경련 산하 기업윤리위원장으로 말년까지 왕성한 활동을 했다. 그러나 지난해 2월 넘어지면서 척추가 부러져 병원과 집에서 치료를 받았다.

고인의 아들인 신철식 국무조정실 정책차장은 "아버님은 지난 1년간 시간 날 때마다 어렵고 약한 자를 위해 노력하고 싸우라는 말을 남기셨다"고 말했다.

김종윤.박신홍 기자


신현확 전 총리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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