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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5)정치엔 초연|학 같은 13년 육영수 여사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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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5면

고 육영수 여사는 박정희 대통령의 부인이었다. 대통령의 부인이었기에 그냥「부인」으로 불리지 않고「영부인」으로 불렸다.
원래는 남의 부인에 대한 경칭이었던 이 호칭이 언제부턴가 대통령 부인만의 호칭으로 굳어지다시피 됐다. 그래서 우리 정치사는 프란체스카(이승만)·공덕귀(윤보선)·육영수·홍기(최규하)·이순자(전두환)·김옥숙(노태우)여사 등 전·현직 영부인들을 갖게 됐다.

<제2부속실 별도로>
추가하자면 김옥윤 여사(장면 총리의 부인)도 이 반열에 포함될 수 있을 것이다.
이중 작고한지 18년째인 육영수 여사가 유독 지금까지도 많은 국민들의 애도를 받고 있는 것은 단순히 박대통령의 통치기간이 다른 이보다 길었다는 이유 때문이 아님은 확실한 것 같다. 육 여사는 다른 어느 퍼스트레이디보다「비정치적」이고자 노력했기 때문에 역설적으로 가장 뛰어난 정치적 성공을 거둘 수 있었다. 더구나 그녀의 비극적인 죽음으로 인해 이제는 박대통령의 업적에 한 후광으로 작용하는 현상까지 일고 있다.
청와대 안에서 박대통령 다음으로 세도 있는 비서실장과 경호실장은 물론 대통령 자산도 함부로 어쩌지 못하는 곳이 있었다. 편의상「제2부속실」이라고 불린 육 여사의 개인 비서실이었다. 제1부속실은 박대통령의「몸종」격이어서 잔심부름부터 시작해 대통령 신변의 온갖 궂은 일을 도맡아 했다. 단 사적이고 비정치적인 일에 한해서.
박대통령 시대에 청와대 본관을 들어서서 계단을 통해 2층으로 올라가면 바로 비서실장집무실이 있었다. 비서실장실 오른쪽으로는 실장보좌관과 비서들의 방이, 왼쪽으로는 3평 가량 밖에 되지 않는 제2부속실이 있었다. 이 방이 통상 남자1명, 여자 2명이 근무하던 영부인의 개인 비서실이었다.
본관 1층 오른쪽에는 대기실·소회의실과 함께 영부인 전용접견실이 따로 있었다. 그 맞은편에 대통령의 서재가 있었고, 박대통령은 오전 6시에 일어나 세수와 산책, 식사를 마친 뒤 정각 9시에 2층에서 1층 서재로 출근」하곤 했다.
『영부인의 비서실은 사실상 따로 움직였습니다. 그쪽에도 온갖 진정서와 민원편지가 날아들었거든요. 자체적으로 처리할 것은 하고, 우리 쪽의 협조가 필요한 사안은 민정 비서관실로 넘기곤 했지요. 영부인이 혼자 행사에 거동할 경우에도 어디까지나 대통령 비서실장인 나는 관여하거나 모시지 않았습니다.』(김정렴 전 비서실장)
제2부속실은 청와대의 구중심처 중 가장 깊은 곳이었고, 그 주인은 74년 8월 총격으로 쓰러지기 전까지의 육여사였다.
「인간 육영수」는 재능으로만 따지자면 범재측에 무난히 낄 정도밖에 되지 않는 것 같다.
만석꾼의 여식으로 태어난 것이 복이라면 복이겠지만, 그보다는 후천적인 노력이 오늘날의 그녀에 대한 평가를 쌓는데 훨씬 큰 몫을 차지한다.
육영수 여사의 배화고등여학교(현 배화여고)시절 학과성적은 바닥권을 맴돌았다. 그녀는 이 학교에 1938년 4월1일자로 입학, 1942년 3월9일자로 졸업했다. 당시 4년제이던 배화고녀 입학 첫 학기의 평균성적은 전교 1백18명중 1백7등, 4학년 마지막학기에는 1백2명중 91등으로 기록돼 있다.

<후천적으로 노력파>
매 학년말의 석차는 1백13명중 89등(1학년), 1백20평 중 86등(2학년), 1백15명중 86등(3학년), 1백2명중 75등(4학년)으로 중위권이상의 성적을 기록한 적은 한번도 없었다. 이과 과목에 약했던 듯 물리(4학년말 평균44점)·기하(56점)점수가 매우 낮았고, 일반에 알려진 것과는 달리 가사 점수(75점)도 특별히 높은 것은 아니었다.
배화고녀 3학년 때 창씨 개명한 탓에 학적부에는「육해영수」로 기록돼 있다. 그녀는 해방이 될 때까지「구가미」(육해)로 불렸다.
「가정」란에 육 여사의 집안은 농업을 하는 것으로 돼 있으나 부동산·동산·연수입을 통틀어「자산」이 무려 20만원으로 기록돼 있어 눈길을 끈다. 육 여사가 배화고녀에 입학하던 해인 1938년 3월4일자 조선일보의 물가란은「경성 일등백미 백키로에 2천2백전」, 즉 22원(1원은 1백전)이라고 적고 있다.
그녀의 부친 육종관씨(65년 작고)는 충북 옥천의 갑부였다.
그러나 어린이날인 지난 5월5일 찾아본 육영수 여사의 옥천 생가는 한마디로 폐가였다. 79년의 10·26사건 이후 보수 한번 하지 않은 채 방치된 결과였다.「인걸은 간데 없고…」정도가 아니라 아흔아홉칸의 전통 한옥 자체도 무너질 만한 것은 거의 무너진 흉가 같은 느낌이었다. 그 날도 대통령의 부인은 어떤 집에서 태어났는지 궁금해하는 중년층 이상의 관광객 한 떼가 버스 편으로 다녀갔다고 한다.

<유족들 의견 안맞아>
『동네 창피해서… 관광객들이 몰려 올 때마다 부아가 납니다. 오늘 왔던 이들도 여사님생가를 구경하고는「옥천 ×늘, ×물에 튀길 ×들」이라고 욕을 하고 가데유. 생가를 저 지경으로 방치했다는 거지유. 그 집 고치는데 일이백만원이 드는 것도 아니고, 우리가 무슨 잘못이 였습니까.』
동네(옥천읍 교동리)의 한 주민은 육 여사의 생가를 찾는 이들이 형편없이 퇴락한 집 모양새에 놀라 동네를 떠나면서 이곳 주민들을 탓하는 게 억울하다고 털어놓았다.
뒷날 박대통령의 장인이 된 육종관씨는 27세에 거금 2만5백원을 들여 이 집을 사들였다. 그는 이 일대의 토호였다.
1925년, 다섯째딸 영수가 태어났다. 큼직한 자라가 품안에 안기는 게 태몽이었다. 육종관씨는 꽃과 화초를 유난히 좋아해 딸들의 이름자에도 영수·예수·난수·혜수·방수·필수·분수 등 가능한 한 초두 부수를 넣고자 애를 썼다. 그는 본부인 이경령 여사(육 여사 등 1남3녀의 생모)외에 3명의 소실을 두고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들어 앉힌 소실만도 모두 7명이었다는 주장도 있다. 어쨌든 그의 슬하에는 총21명의 자녀가 태어났고, 지금 생존해있는 이는 남녀 8명씩 16명이라고 주위에서 증언한다.
박대통령 사후 육 여사의 생가가 마냥 방치된 것은 육종관씨 측 직계자손들의 의견이 선뜻 모아지지 않은 탓이라고 한다. 이중 장남인 육인수 전 의원은『그곳의 토지는 아직도 돌아가신 선친 명의로 되어 있다』며『3년 전부터 전국에 흩어진 가족들을 제주도까지 찾아다니며 의견 절충을 모색했으나 진척이 없었다. 한두푼이 드는 공사도 아니고…』라고 고민을 내비쳤다.<26면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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