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내생각은…

미국을 우리 기준으로 보지 말라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29면

미국 버지니아공대 총격 사건은 상상을 초월하는 참극이었다. 교포나 국민은 수치스러움과 함께 사건의 파장이 '한국인' 전체로 번지는 것을 두려워하고 있다. 그런 배경에는 그가 한국인이라는 인식이 진하게 배어 있다. 하지만 미국인과 미국 사회를 우리 시각으로 이해하고 접근하는 것은 곤란하다. 미국은 다양한 인종과 민족이 어울려 살고 있는 사회다. '용광로' '다문화' '다민족'은 그들의 정체성을 가장 잘 드러내 주는 말이다. 따라서 미국인들을 우리 기준으로 정의하면 안 된다. 한국에서 이민 갔다는 이유로 여전히 한국인으로 생각하고, 독일에서 이민 갔다고 해서 독일인으로 생각한다면 미국과 미국인은 존재할 수 없다.

미국인에게 인종.피부색.민족 배경은 중요하지 않다. 아니, 의식적으로 그러한 기준을 가지고 남과 나를 구분하려 하지 않는다. 어떠한 배경을 가지고 왔든 그 땅에 발 붙이고 살고 있으면 모두 미국인이다. 만약 그들이 아직도 자기가 떠난 고국을 기억하고 자기 할아버지의 할아버지가 살았던 곳이 자신들의 조국이라고 생각한다면 미국인에게 조국은 수십 개가 넘을 것이다.

여기에 우리와 그들 사이에 인식의 차이가 존재한다. 우리는 어디에 살든 우리 얼굴을 하고 있고 우리의 피가 섞여 있으면 언제나 한국인이다. 토비 도슨은 한국인 생부를 두었다는 이유로 우리와 기쁨과 아픔을 함께하는 한국인이며, 골프 천재 미셸 위도 별반 다르지 않다. 이번 사건을 보는 두 나라 국민 사이에는 이런 인식 차이가 뿌리깊게 박혀 있다.

한편 미국은 개인이 자신의 행동을 책임지는 철저한 개인주의 사회다. 우리처럼 자식의 잘못이 부모의 책임으로 이어지고, 나아가 한 개인의 잘못된 행동이 민족이나 종족을 대표하는 것으로 인식되지 않는다. 그렇게 된다면 엄청난 파장을 불러일으키게 된다. 이번 사건이 미국에 살고 있는 소수 민족인 어느 한국인이 미국 주류 사회에 대해 총부리를 겨눈 것이라고 해석해 보자. 나아가 중국인.일본인을 포함한 동양인이 저지른 행동으로 일반화해 버리면 파장은 상상할 수도 없다. 이는 미국 사회의 가장 민감한 역린(逆鱗)을 건드리는 것이 된다. 그들은 과거 경험을 통해 인종.민족.문화를 의식적으로 드러내지 않는 것이 미국이라는 연합체를 유지하는 길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다.

우리는 그 점을 이해하고 신중하게 대처해야 한다. 미국에서 일어난 참극에 대해 안타까운 마음을 표현할 수는 있지만 대통령은 물론 온 국민이 죄인이 된 듯한 느낌을 가지고 접근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미리 나서서 '한국인'으로서 사죄하고, 조문을 하고, 위로금을 모으는 부산을 떨 필요는 없다.

이 같은 사건은 누구나 범인이 될 수 있다. 단지 우연하게 그가 한국인이었을 뿐, 한국인으로 연결시킬 필요는 없다. 그는 인생의 반 이상을 미국에서 살고 시민권을 신청하면 언제든지 미국 시민이 될 수 있는 미국인이다. 그런데 그를 자꾸 우리와 연관시키면 오히려 이 문제를 왜곡시키고, 뜻하지 않게 인종과 민족이란 뇌관을 건드리는 결과를 가져올 수 있다. 더 이상 이 사건을 우리의 관점에서 재단하고 평가하지 않았으면 한다.

이병민 서울대 교수·영어교육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