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노의 절제'… 치유는 시작됐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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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버지니아공대(버텍) 관악단이 19일 총기 난사 사건 부상자들이 치료받고 있는 블랙스버그 몽고메리병원 앞에서 쾌유를 비는 연주를 하고 있다(왼쪽 사진). 부상자 힐러리 스트롤로가 관악단 연주 모습을 병원 창문 틈으로 바라보며 미소짓고 있다(오른쪽 사진). 사건 당일인 16일 노리스 홀에서 프랑스어 수업을 듣던 스트롤로는 범인 조승희가 쏜 총에 배와 엉덩이 부위에 부상을 입었다. [블랙스버그 로이터.AP=연합뉴스]

"슬픔이 아무리 커도 우린 다시 일어설 겁니다. 호키(Hokie.칠면조를 닮은 버지니아공대의 마스코트) 정신으로 말이죠."

총기 난사 사건이 일어난 지 나흘째인 19일 이 대학 정보공학과 3학년 조이 베리는 강한 의지를 보였다. 마침 대학 신문인 '칼리지에이트 타임스(Collegiate Times)'가 캠퍼스에 뿌려지고 있었다. 1면 톱 제목이 '상처 치유를 시작할 때(Beginning to heal)'다. 신문은 한국인 재학생 김호덕.김태원.서니박이 교정에 놓인 조화 앞에서 슬픔에 잠겨 있는 사진을 1면에 크게 실었다.

애팔래치아산맥 동남쪽 기슭 블랙스버그에 자리 잡은 버지니아공대. 이날 학교 측은 참사 현장인 노리스 홀(공학관) 일부를 공개했다. 성 모양의 4층 건물 2층과 3층을 연결하는 대형 유리창 3개는 모두 깨져나갔다. 반쯤 열린 문틈으로는 어지럽게 널린 책상과 집기들이 보였다. 피비린내는 아직도 남아 있는 듯했다. 참극의 현장을 찾은 학생들은 그날의 악몽에 다시 치를 떨었다.

그러면서도 아픔을 딛고 일어서는 모습은 뚜렷했다. 한 학생은 전면 중단됐던 강의가 23일 재개된다는 소식에 "어떤 일이 있어도 수업은 빨리 다시 시작돼야죠"라고 말했다. 9.11 테러 이후 최대의 인명 피해를 낸, 미 역사상 최악의 총기 사고에 대처하는 캠퍼스의 모습은 성숙해 보였다. 거리에서 만난 대부분의 시민도 "조승희의 범죄는 한국과 무관한 일"이라고 말했다. 반한(反韓)의 목소리는 없었다.

◆ 울음소리 내지 않은 유족들=사랑하는 자식을 잃은 유가족들은 냉정하리만큼 침착했다. 희생자 가족들이 묵고 있는 캠퍼스 내 호텔 '버지니아텍 인'은 추모 분위기에 젖은 채 매우 조용했다.

1차 범행 후 2차 범행까지 두 시간 동안 학교 당국과 경찰은 무얼 하고 있었느냐며 교직원이나 경찰의 멱살을 잡고 고성을 퍼붓는 일이 있을 법도 한데 없었다고 한다. 스무 살짜리 딸을 잃었다는 어머니에게 "당국의 늑장 대처에 화가 나지 않느냐"고 묻자 "물론 슬프고, 화도 나지만 사실 여부가 판명 안 된 상황에서 성을 낸다고 무슨 도움이 되느냐"며 "조사가 끝날 때까지 조용히 지켜볼 것"이라고 말했다. 분노의 표출을 절제하고 슬픔을 다스리고 있었다.

엄청난 사건인데도 대학 총장이나 경찰 책임자의 경질을 요구하는 소리도 들리지 않고 있다. 버지니아공대의 고위 관계자는 "사건이 수습되고 책임이 규명되면 관련 공직자가 응분의 책임을 지는 건 미국도 당연하다"면서도 "지금은 사실을 규명하는 작업이 진행 중"이라고 말했다.

◆ 차분한 추모 분위기=거창한 합동분향소를 설치하지 않고 간소하고 차분하게 치러지는 미국의 추모 문화도 돋보였다. 대학 중앙 잔디광장에 사망자를 상징하는 돌 33개와 '사랑해' '잊지 않을 거야' '넌 참 좋은 친구였어'와 같은 추모의 글을 적는 나무판이 설치됐을 뿐이다. 유가족들은 경찰이 조사를 끝내고 시신을 넘겨 줄 때까지 묵묵히 기다렸다가 고향에서 개별적으로 장례식을 치를 예정이라고 말했다.

이 대학 한인학생회(회장 이승우)는 다음주 학교가 다시 문을 여는 대로 총회를 열고 '한인 학생들의 새로운 출발'을 다짐할 계획이다. 한인학생회는 총기 사건으로 위축된 한인 학생들의 학업 의욕을 높일 프로그램을 준비하는 한편 혹시 있을지 모를 협박에 대비해 학교 당국과 공조를 취하기로 했다.

블랙스버그=강찬호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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