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취재일기

범죄와 국적은 별개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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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2면

"미국은 이번 사건을 한 개인에 의한 범죄로 보고 차분하게 다루고자 한다. 노무현 대통령에게 이런 뜻을 전해달라."

필립 라고 백악관 국가안전보장회의(NSC) 부보좌관은 17일 버지니아공대에서 열린 희생자 추모 집회에 참석한 권태면 주미대사관 총영사에게 이렇게 말했다. 교수와 학생 32명을 잃고 비통에 잠긴 이 대학의 존 돌리 교무 부처장도 '미안하다'는 말을 연발하는 권 총영사에게 "모든 유가족을 만났는데 아무도 한국에 분노하는 사람은 없었다"고 되레 위로했다. 돌리 부처장은 "굳이 하나 부탁을 한다면 9월 새 학기를 맞아 열리는 미식축구경기 개회식에 이태식 주미 대사가 축사를 해주는 것"이라고 덧붙였다. 이번 사건에도 불구하고 이 학교가 한국 학생들과 맺어온 오랜 인연을 지속하고 싶다는 마음을 표현한 것이다.

그런데 대부분의 TV에선 17일 하루 종일 "한국인 킬러(South Korean Killer)가 9.11 테러 이후 최대의 학살극을 저질렀다"며 조승희씨를 언급할 때마다 '한국 출신(from South Korea)'이란 말이 따라나왔다.

이를 본 한 교포는 "조씨가 한국 국적인 것은 맞지만, 자칫 미국인들에게 범인이 조씨 개인이 아니라 한국 전체로 비칠까 봐 걱정이 크다"고 말했다. 17일 버지니아공대 교정에서 만난 한 한국계 교수도 "조씨는 한국인이 아니라 사실상 미국인"이라며 "이번 사건은 불안한 정신상태와 치정 등 개인적 동기에서 빚어진 끔찍한 개인 범죄일 뿐 한국과는 무관하다"고 강조했다. 그는 "범행 동기가 아닌 국적에만 초점을 맞추면 자칫 사건의 본질이 호도돼 일부에서 한국과 재미 한인들에게 무조건적인 분노를 일으킬 수도 있다"고 우려했다.

실제로 조씨는 8세 때 미국으로 건너간 이민자로 15년간 미국에서 살아왔다. 오래전에 영주권을 받아 시민권 취득도 가능한 상태였다. 국적만 한국인일 뿐 문화나 환경 요인으로 보면 미국인이다. 조씨 집 앞에 현장 취재 나온 워싱턴 포스트의 린튼 윅스 기자도 "조씨는 청소년기 전체를 이곳에서 미국식으로 자랐기 때문에 나는 그를 미국인으로 생각한다"고 말했다.

미 정부 당국자들도 "이번 사건은 사실상 미국인에 의해 저질러진 개인적 범죄로, 외국인이 미국에 증오를 품고 저지른 테러나 인종 혐오 범죄와는 완전히 다른 것"이라고 강조한다.

조씨의 범죄를 미워하는 것과 그걸 한국.한국인과 연결지어 비이성적인 분노를 투사하는 건 전혀 별개다. 한국에서나, 미국에서나 이 점을 분명히 인식할 필요가 있다.

미국 정부는 그 두 가지를 구별하는 현명함을 보여줬다. 다행히 미 언론과 시민들도 그런 현명함을 보여주고 있다. CNN을 비롯한 언론들은 "조씨의 범행에도 불구하고 한국인을 미워하지 않으며, 그의 국적은 이 범죄와 아무 관련이 없다"는 시민들의 인터뷰를 잇따라 내보내고 있다. 이런 이성적 판단은 건강하고 발전적인 한.미 관계를 위해서도 꼭 필요하다.

강찬호 워싱턴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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