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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지영 가족 소설 - 즐거운 나의 집 [2부] 즐거운 집(35)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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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6면

엄마에게 소설 이야기를 물은 내가 바보였다. 엄마가 쓰고 있는 소설에 대해 물으면 대답은 둘 중의 하나라는 걸 내가 깜빡했던 거다. 지금처럼 자기 자신의 글과 감정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자화자찬을 해대거나, 아니면 이런 말을 했다.

"안 돼. 아무래도 안 되겠어. 신문사에 전화해서 미안하다고, 정말 내가 너무 과분한 일을 벌인 거 같다고, 모든 책임은 나에게 있다고, 어떤 대가도 감수하겠다고 정중하게 사과하고, 연재 중단의 변을 일생일대의 명문장으로 써서 보낸 다음 어디 수도원에라도 가서 잠적을 하는 수밖에 없어…."

처음에 이런 소리를 들었을 때, 나는 가슴이 철렁했었다. 갑자기 단칸방에서 젓가락처럼 포개어져 잠이 들어야 하는 우리 형제들이 떠올랐고, 수도원에 들어가 눈물로 기도하고 있는 엄마를 대신해서 내가 대학 진학을 포기하고-절대 공부를 못해서 떨어지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 그 시기는 꼭! 수능 점수가 나오기 전이어야만 한다-취직을 해서 그 월급으로 동생들을 공부시키는 장면이 떠올랐던 것이다. 그런데 언젠가 엄마랑 절친한 친구인 수 아줌마가 전화를 했길래 "수 아줌마 우리 엄마 심각해요. 이럴 땐 어떻게 하죠?" 하고 이 이야기를 했더니 수 아줌마는 깔깔 웃으며 "이제 곧 글이 나오겠군"했다. 그리곤 덧붙였던 것이다.

"위녕 걱정하지 마. 그거 작가의 생리 전 증후군 같은 거야."

엄마의 소리를 더 듣지 않으려고 칫솔에 치약을 묻히고 있는데 엄마가 화장실까지 나를 쫓아와 물었다.

"위녕, 그 다음 장면이 궁금하지 않니? 그 애들 둘 어떻게 될 거 같니?"

내가 치약을 잔뜩 입에 물고, "그걸 내가 어떻게 알아. 몰라." 대답하자, 엄마는 "어떻게 안 궁금하니? 난 궁금해 죽겠어…. 아, 둘이서 결국 어떻게 될까 그 다음에?"하며 부엌으로 가다가 갑자기 멈춰서더니 말했다.

"어머! 그건 내가 써야 되는구나. 에잇, 이럴 땐 내가 작가라는 게 정말 짜증나."

엄마의 장점이자 단점은 이렇게 수선을 피워서 우울할 틈이 없게 한다는 것이다. 덕분에 아빠를 만나러 가는 아침은 내게는 생각보다 힘이 들지 않았다. 한잠을 자고 났더니 아빠가 그렇게 미운 것 같지도 않았다. 이런 걸 보고 나보고 변덕이 죽 끓듯 한다면 그건 좀 너무한 일일 것이다. 이런 감정을 간단히 요약한 유명한 단어도 있지 않은가. '애증'이라고. 나는 제일 맘에 드는 옷을 찾아 입고 약간 화장도 했다. 그래도 B시에 와서 아빠를 처음 만나는 건데, 예쁘게 보이고 싶었다. 물론 다른 이유도 있다. 내가 할머니와 살 때도 있었던 일인데 아빠를 만나 밥을 먹으려고 하면 내 복장에 따라 메뉴가 결정되곤 한다는 것을 내가 눈치챈 것이다. 내가 늦잠을 자다가 눈곱만 겨우 떼고 나가면 아빠는 심드렁하게 "뭐, 순대국이나 먹자" 이랬고, 내가 남자친구와의 다음 약속을 위해 한껏 치장을 하고 나가면 "오늘은 위녕 좋아하는 패밀리 레스토랑에 갈까?" 이렇게 말했다. 남자들이란 이상하다. 아무리 딸이라도 제 곁에 있을 때 예쁜 게 좋은가보다.

아빠는 또 늦었다. 아빠의 단점 중의 하나는 늦는다는 것이다. 그것은 아마도 머리는 폭발 직전에 이를 때까지 치밀하지만 몸은 게으른 탓이다. 약속시간이 7분이나 지났길래 전화를 해보았더니, "길이 너무 막힌다" 는 것이었다. "언제 길이 막히지 않은 일이 있었어?" 물으니까 아빠는 "어젯밤에는 안 막히던데" 했다. 아빠의 어젯밤이란 아마도 출판사 회식이 있는 날이었으니까 밤 11시 이후일 것이다. 패밀리 레스토랑에서 아빠와 마주 앉자 이상하게 가슴이 콩닥콩닥 뛰었다. 나는 아무래도 아빠를 사랑하는 게 틀림이 없긴 했다. 그리고 우리 아빠가 세상 어떤 아빠보다 멋있다고 생각하곤 했다. 물론 이건 40대 중반 이후의 남자들 중에서 그렇다는 것이고 내가 좋아하는 SS501 '옵화'들-이 철자를 읽는 법을 아빠와 엄마는 모른다. 한번은 엄마가 에스에스 오공일이라고 읽어서 나를 분노케 한 적이 있으니까-과는 비교할 수 없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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