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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일성 “빈농을 끌어안아라”(비록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49)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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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1면

◎토지개혁 상/「자작농 염원」겨냥 지지기반 확대 포석/무상몰수·무상분배,소작제도는 금지/곳곳서 소요… 땅 뺏긴 지주들 대거 월남
북조선 임시인민위원회가 46년 3월6일 발표한 토지개혁은 북한 전역을 충격으로 몰아넣었다.
이날 발표된 「토지개혁볍령」「토지개혁 실시에 대한 임시조치법」과 3월8일 발표된 「토지개혁 법령에 관한 세칙」은 가위 혁명적이라고 할만했다.
이들 법은 기존의 토지소유 관계를 전면 부정하고 ▲5정보 이상 소유토지와 면적에 관계없이 소작주는 토지의 무상몰수·무상분배 ▲소작제 금지를 골자로 북한 전역에 토지개혁을 실시한다는 내용을 담고있었다.
그같은 조치는 지주와 소작인 이라는 토지 중심의 신분질서를 사회유지의 근간으로 여겨왔던 뿌리깊은 전통관념을 근본적으로 흔드는 것이었다. 지주들과 결별하고 빈농을 지지기반으로 삼겠다는 메시지를 담고있는 이 조치는 농민에게는 희망으로 다가왔지만 지주들에게는 절망이었다.
아직 노골화되지는 않았지만 농민과 지주 모두 막연하게 생각했던 계급혁명의 실체가 조금씩 다가오고 있다는 느낌에 사로잡히게 됐다.
「땅을 빼앗기는 자」와 「땅을 새로 갖게 되는 자」사이에는 순식간에 명암이 교차했고 깊은 골이 패었다.
토지개혁후 대거 늘어난 월남인파와 북한 전역을 한때나마 휩쓸었던 크고 작은 소요는 토지개혁의 충격을 반영하는 것이었다.
이 조치의 이면에는 북한을 혁명기지화하고자 하는 소 군정과 김일성의 일치된 이해관계가 깔려있었다.
당시 북한 인구의 절대다수를 차지하는 빈농의 「자작농이 되고자 하는 염원」을 겨냥한 이 조치는 광범위한 지지기반 구축을 위한 준비라는 의미를 함축하고 있었다.
○임정주도권 노려
단기적으로는 토지개혁을 통해 북한 농민들뿐 아니라 남한 농민들로부터도 지지를 유도해 조만간 수립될 임시정부에서 주도권을 장악하고자 하는 계산도 있었다.
토지개혁은 이처럼 북한 전체에 변화를 강요하는 거대한 작업이었을뿐 아니라 미소 공위와 같은 국제적 변수까지도 고려해야 했던 복잡한 작업이었다.
때문에 토지개혁은 당시 북한 유일의 통치세력인 소 군정이 의도적으로 추진한 것으로 간주돼 왔었다.
미 국방성 출판물 7118호 『북조선:집권의 수법에 대한 사례연구』는 그같은 관점을 반영하고 있다.(강성구 『좌절된 사회혁명』)
그러나 전 북한 고위관리 서용규씨가 처음으로 공개하는 토지개혁의 전개과정은 전혀 새로운 사실을 보여주고 있다.
서씨의 증언.
『해방직후 북한은 빈농이 인구의 절대다수를 차지하는 농경사회였습니다.(1943년 당시 북한 농가 가운데 지주는 4%에 지나지 않았고 소규모 자작농이 24%였으며 나머지는 영세빈농이나 소작인이었다)
무엇보다 빈농에게 농지를 제공하는 문제가 심각했고 군정소유로 된 구일제 토지의 재정리도 시급한 문제였습니다. 토지개혁의 필요성이 높았지요.
그러나 개혁의 주체도 없고 소 군정도 이렇다할 조치를 취하지 않아 방치되었습니다.
그러나 임시 인민위원회가 만들어지는 과정에서 본격적으로 거론되기 시작했습니다.
토지개혁이 처음 공식적으로 거론되기는 46년 1월말 공산당 북조선 조직위원회 5차 확대 집행위원회에서였습니다.
김일성을 중심으로 한 빨찌산파와 국내파가 적극적이었습니다.
빨찌산파는 1930년대초 중국 공산당 소속으로 만주에서 빨찌산으로 항일투쟁을 하면서 부분적으로 토지개혁을 해봤던 경험을 갖고있어 토지개혁이 지지기반을 만드는데 중요하다는 점을 잘 알고 있었어요.
○소 군정 주도 안해
거기에 임시인민위원회의 정당성을 부여받기 위한 개혁조치로 토지개혁을 꼽은 것이지요.
국내파는 임시 인민위원회를 반대했지만 토지개혁이 필요하다는 점은 동의하고 있었습니다.
소 군정은 일체 의견을 표시하지 않다가 전체 의견이 수렴되자 받아들이는 형식을 취했습니다.
소 군정이나 김일성이 서둘러 토지개혁에 나선 것은 시기적으로 임시정부 수립을 의식해서였습니다.
당시는 미소 공위 1차 회의를 앞둔 시점인데 공위에서 임시정부 수립을 합의해도 통일정부 수립 전에 북쪽에서 토지개혁의 모양을 갖춰놓으면 남쪽에서도 자연스럽게 토지개혁에 나설 것으로 생각했던 것이지요.
당시 북한 공산당 지도자들은 남북 모두에 혁명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습니다.
이 회의에서 빠른 시일안에 토지개혁을 하기로 했고 토지개혁법 작성,작성준비 기초위원회 구성,법령의 기본골격이 집중 논의됐습니다. 회의가 끝난뒤 토지개혁법령 작성 기초위원회가 구성됐습니다.』
서씨의 이같은 증언은 토지개혁에서 소 군정의 역할은 추인 및 지원에 집중됐고 처음부터 주도한 것은 아니었음을 밝히는 것이어서 주목된다.
계속되는 서씨의 증언.
『소련의 토지개혁과 북한의 토지개혁은 성격이 달랐습니다.
소련은 혁명 당시 전국토를 국유화한 것이었지만 북한의 토지개혁은 일정규모 이상의 토지를 몰수해서 분배한다는 것이었지요.
그처럼 성격이 판이한 토지개혁을 군인에 지나지 않는 소 군정 책임자들이 주도하기는 어려웠습니다.
그렇다고 소 군정이 토지개혁을 별도로 연구한 일도 없었습니다.
허가이 등 당시 북에 와있던 소련파도 소련에서 조직이나 교육부문에서 활동했고 토지개혁에 대한 경험이나 지식이 없어 토지개혁에 앞장설 수 있는 입장이 아니었습니다.
스탈린 지시에 따라 소련내의 전문가들이 개혁법안을 만들어 갖다준 것도 아닙니다.
토지개혁안이 마련되는 과정에서 논란을 벌였던 각종 문제들은 당시 현지 조사가 반드시 필요한 것인데 소련의 전문가들이 별도로 조사를 나오거나 북한의 공산당원이 동원돼 조사를 해 소 군정에 보고하는 일도 없었습니다.』
서씨는 토지개혁이 김일성과 국내파가 중심이 돼서 추진된 증거로 이렇게 부연하고 있다.
『토지개혁 법령 작성위원회를 구성하기로 했지만 막상 토지문제 전문가를 구하기가 어려웠습니다. 평양에는 사회경제학자인 김광진(후에 사회과학원 경제연구소 소장) 밖에 없었습니다.
○서울 전문가 초청
그래서 서울에서 활동하던 진보적인 사회경제학자 가운데 토지전문가인 박문규(후에 내무상)와 법학자인 최용달(후에 사법국장)을 초청했습니다. 박문규는 조교 몇명과 함께 왔습니다. 박은 토지개혁 법령을 만드는데 활동한뒤 서울로 돌아갔고 최는 평양에 머물렀습니다.
이들이 초청되어 박문규·최용달·김광진 등 전문가와 안길·김책·주영하 등 당인사를 중심으로 토지개혁법령 작성위원회가 구성됐습니다. 위원장은 김책이 맡았고 소 군정측에서는 아무도 참가하지 않았습니다.』
토지개혁을 서두르기도 했지만 결코 간단한 문제는 아니었다.
농민들의 토지소유 실태를 먼저 파악해야 했고 사회주의적인 방향으로 토지를 몰수하고 분배할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해야 했기 때문이었다.
5차 확대집행위원회가 끝난뒤 활발한 현지조사가 벌어졌다.
계속되는 서씨의 증언.
『5차 확대집행위원회에서 기본적인 원칙이 합의되고 법령 작성위원회가 만들어진 뒤 김일성이나 위원회 위원들은 현장조사에 나섰습니다.
농민들의 실제 토지소유 형태를 파악하기 위해 김일성을 비롯해 이 문제를 정치적으로 책임지던 김책·안길 등이 수차례 농촌을 돌아보았습니다. 김일성은 주로 대동군·남포·강동군·장수원 쪽으로 나가 농민들과 직접 만나 이야기도 나누고 좌담회도 가졌습니다.
또 공산당 북조선 조직위원회 중앙부서의 하나인 농민부에서도 북한 전역의 농촌으로 사람을 파견해 토지소유 실태조사 사업을 활발하게 전개했습니다.』
5차 확대집행 위원회 이후 한달정도 지나면서 윤곽을 드러낸 토지개혁안은 46년 2월20일 공산당 북조선 조직위원회 상무위원회로 넘겨졌다.
□특별취재반
북한부
김국후 차장
안희창 기자
유영구 기자
안성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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