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 달러 좀 쌓였다고 투자기구 만든다니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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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4면

한국투자공사(KIC) 설립을 둘러싸고 재정경제부와 한국은행이 갈등을 빚고 있다. 11월 말 현재 1천5백억달러를 웃도는 외환보유액 중 일부와 연기금 외화자산을 해외 투자에 활용하기 위해 별도 기구(KIC)를 2005년 출범시키겠다는 계획을 재경부와 청와대가 밀어붙이고 있다. 반면 한은은 현 외환보유액도 '만일의 사태'에 대비하기엔 불안하므로 위험한 짓은 하지 말자고 기를 쓰며 반대하고 있다.

한국의 적정 외환보유액이 재경부가 내세우는 1천2백11억달러인지, 아니면 진짜 '부족한 수준'인지에 대해선 판단이 다를 수 있다. 현 외환보유액이 외환위기 때보다 21배나 되며, 이를 투자해 고수익을 올리고 국제 금융계에서 영향력을 키우는 게 국익 차원에서 도움이 될 수도 있다.

그러나 현 시점에서 더 중요한 것은 국민을 또다시 위험에 노출시키는 실험을 되풀이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우리 경제력과 외환보유액을 과대평가, 과도한 외환자유화를 추진했다가 결국 국제통화기금(IMF)의 급전으로 국가 부도를 모면한 1998년의 악몽을 재경부는 벌써 잊었는가.

정말 현 외환보유액을 유지하는 게 낭비라고 판단된다면 한은 등과 협의해 합의점을 찾은 후 손을 대는 게 옳다. 무역흑자 기조가 지속될지, 외환수급에는 차질이 없을지, 해외투자 때 수익률은 지금보다 얼마나 높을지 등을 면밀히 따져봐야 한다.

특히 이를 위해 새 기구를 만들겠다는 것도 납득이 안 간다. '재경부 자리 만들기'란 비판을 받을 만하다. 재경부는 한은이 맡고 있는 외환관리권을 챙기고, 청와대는 '동북아 금융허브'라는 정치적 캐치프레이즈를 위해 손발을 맞추고 있다는 비판도 경청하라.

재경부는'하이리턴(고수익)'을 명분으로 국가경영 차원에서 최후의 보루인 외환보유액과 국민의 장래가 걸린 연기금을 '하이리스크(고위험)'에 노출시키는 일은 말아야 한다. 한은도 '외환관리는 내 밥그릇'이란 인식을 버리고 외환보유액의 효율적 관리.운용에 적극 협조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