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여·민중시가 시들어간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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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3면

참여·민중시의 깃발은 내려지고 있는가.
주요 문예지 최근호들에 발표된 참여시인들의 시나 산문을 보면 80년대를 풍미했던 크고 날카롭던 현실비판 목소리나 변혁에 대한 낙관적 전망은 사라지고 황혼을 맞이하는 오열 혹은 자질구레한 주변정서로 낮게 내려오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또 대학생들의 시에서도 민중투쟁에의 참여를 외치는 선전·선동시가 깨끗하게 사라지고 있는 것으로 나타나 이제 정치적·이념적 주장을 높이 외치던 참여·민중시가 기성문단은 물론 대학수준도 시들어가고 있음이 드러났다.
『해가 진다 일그러져서 해가 진다/산과 들을 뜨겁게 달구던 날도 잊고/발길에 채이며 곤두박질치며/스스로도 부끄러워 얼굴을 숙이고/서산을 넘어 허공으로 사라진다/머지 않아 깊은 어둠이 오겠지/젖은 치마자락으로 세상을 덮겠지/그 치마자락 속에서 독버섯이 자라/한 뼘 안 남기고 천지가 납빛이 되면/다시 들려오겠지 해를 찾는 숨죽인 신음이/크고 밝은 빛을 찾는 거센 울부짖음이/독버섯을 시들리며 해는 다시 뜨겠지만/…(중략)』
『한길문학』봄호에 발표된 신경림 시인(민족문학작가회의 회장)의 시 『낙조』다. 70, 80년대 신씨의 시를 뚫고 흐르던 민초, 들의 건강한 삶의 정서나 저항의지는 확연하게 드러나지 않는다. 대신 황혼 무렵의 어스름만 슬프게 깔리고 갈채·환호·크고 밝은 빛 등 광명천지에 대한 희구는 과거 혹은 미래의 것이어서 현재의 어둠은 더욱 깊기만 하다.
『나이 탓인가/눈 침침하다/눈은 넋그물/넋 컴컴하다/새벽마저 저물녘/어둑한 방안 늘 시장하고/기다리는 가외소리 더디고/바퀴가 곁에 와/잠잠하다』
오랜 시적 침묵을 깨고 김지하씨가『세계의 문학』봄호에 발표한 시『쉰』중 일부다. 「신새벽 뒷골목에/네 이름을 쓴다 민주주의여」라며 민주주의의 새벽을 외치던 김씨는 이제 새벽마저 저물고 넋 컴컴하다며 회의에 빠져들고 있다.
지천명·이순 길에 접어든 중진시인들의 시에서만 이런 현상이 나타나는 것은 아니다.
『기필코 우리가 가야 할 길/투쟁의 길을 걷는데/왜 절망이 가슴을 짓누르고/왜 나의 눈에는 눈물이 고일까?』
『더 이상 너를 빛낼 어둠이 없다/더 이상 너의 눈물을 빛낼 꽃이 없다/어둠이 없고 꽃이 없으므로 당분간/네가 없다 아아 네가 사라진다』
각각 『실천문학』 『문학과 사회』봄호에 발표된 신예시인 정인화씨의 『왜, 나의 눈에는 눈물이 고일까?』와 중견시인 김정환씨 『사람노래1』의 일부다. 노동시인 정씨로서는 도저히 가져서는 안될 「패배주의적 정서」를 직설적으로 토해내고 있다.
왜일까? 80년대 급진적 문예운동의 한 부분을 담당했던 김씨의 시에서처럼 어둠이 없고 꽃이 없기 때문이다. 상반된 이미지이면서도 동일한 가치로 쓰인 어둠과 꽃은 우리 사회 자체의 모순과 그것을 변혁시키려는 운동에 쏟아진 열광이었다.
이제 어둠을 배경으로 변혁에 대한 희망찬 언어를 펄럭이면 따라오는 열광의 시대는 갔다는 인식이 최근 발표되고 있는 참여·민중시에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한편 김탁환씨(서물대대학원국문과)는 90∼91년 발표된 각 대학생들의 시 1천여편을 분석한 평론 「절망의 몸짓과 희망의 표정」(『한길문학』봄호)에서 『90년대 들어 80년대 주류를 이루던 역사·민중 등의 무겁고 힘든 주제를 다루는 것보다 자기 일상에서 느끼는 부분들을 형상화하고 있는 작품이 점차 많아지고 있다』며 『이는 학생들이 시에서 보편적 이념이나 주제를 다루어야한다는 강박관념에서 벗어났기 때문』이라고 풀이했다.
시인 이시영씨는 『끝간데 없는 현실참여로 역동성을 띠었던 참여·민중시가 갈수록 상투화·도식화돼 이제 대중들로부터도, 시문학으로서도 외면 당하고 있다』고 밝혔다.
이씨는 『민주주의·노동·농촌·통일문제 등 아직 과제가 산적한 우리 현실에 대처해나가기 위해 관념적·단선적인 이념, 역사의식에서 벗어나 냉철한 현실인식과 더불어 예술성을 회복해야만 참여·민중시는 계속 민족문학의 중요부분을 차지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경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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