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취재일기

'말' 앞선 행자부 장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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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10일 오전 11시쯤 갑자기 행정자치부에서 출입기자들에게 연락이 왔다. 박명재 장관이 지방자치단체의 인사쇄신, 이른바 '무능 공무원 퇴출'과 관련해 기자들에게 할 얘기가 있다는 내용이었다. 오후 4시30분. 박 장관은 브리핑룸에 모인 기자들에게 "행자부도 지자체에 버금가는 인사 혁신 방안을 도입하겠다"고 발표했다.

일순간 긴장이 흘렀다. '중앙부처에도 드디어 퇴출 바람이 몰아치나 보다' 싶었다. 하지만 그게 전부였다. 박 장관이 결재서류철에 끼여 있는 '혁신 방안'을 읽어내려가는 동안 기대감은 실망감으로 변해갔다.

박 장관은 업무 실적과 근무 태도가 극히 불량한 공무원을 추려내 이들을 일정 기간 재교육하거나 보직을 변경한 뒤 그래도 공직사회에 적응할 수 없다고 판단되면 직권면직 등의 조치를 취하겠다고 밝혔다. 하지만 이는 국가공무원법 제70조와 제73조에 이미 다 나와 있는 내용이었다. 곧바로 기자들의 질문이 쏟아졌다.

-구체적으로 준비된 계획이 있나.

"스케줄은 뭐…. 제가 (장관으로) 있는 내내 이뤄지겠죠."

-그럼 재교육은 언제쯤 가능한가.

"(잠시 생각하다가) 현재 자료를 파악 중이다."

엇비슷한 질문과 답변이 10여 차례 반복된 뒤에야 간담회는 끝났다. 아무런 구체적 계획도 없이 기존의 법 조항만 '혁신 방안'이라고 내놓은 어이없는 자리였다.

곧장 "이럴 거면 뭐하러 간담회를 자청했느냐"는 볼멘소리가 여기저기서 터져나왔다. 배석했던 행자부 관계자들도 "아직 저렇게 치고 나갈 만큼 준비가 안 됐는데…"라며 곤혹스러워했다.

박 장관이 울산시.서울시 등 지자체의 잇따른 퇴출제 도입이 큰 지지를 얻자 알맹이도 없이 서둘러 분위기에 편승하려는 것 아니냐는 지적도 나왔다. 포퓰리즘(인기영합주의)의 전형적인 모습이라는 것이다.

박 장관은 입장을 분명히 할 필요가 있다. 중앙 공무원 사회에 퇴출제를 도입할 의지가 정말 있다면 장관직을 걸고서라도 철밥통 깨기에 나서야 한다. 그럴 자신이 없다면 언론 플레이는 그만두고 기존의 법과 제도를 충실히 적용하는 데 힘써야 할 것이다. 장관이 여론만 좇고 인기만 생각하면 그 피해는 고스란히 국민에게 돌아갈 뿐이다.

박신홍 사회부문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