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 사람] 19개월째 어머니묘 돌보는 유범수씨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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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7면

충남 서산시 성연면의 29호 국도변 야트막한 선산에서 1년7개월째 '시묘(侍墓)살이'를 하고 있는 유범수(柳範秀.50.경기도 부천시)씨. 2년전 돌아가신 어머니 묘소에 하루 세끼 따뜻한 밥을 올리며 묘 옆 움막에서 생활하고 있다.

그는 시묘 생활 두번째로 겨울을 맞았다. 서둘러 움막의 간이식 온돌에 땔 나무도 장만했고, 집에서 가져온 김장 김치도 움막 아래 장독에 묻었다. 그는 며칠새 갑자기 몰아친 추위로 고생했다. 움막 방바닥은 따뜻하지만 이불까지 파고드는 찬바람은 어쩔수 없어 밤새 몸을 떨어야 했다. 묘소에 쌓인 첫눈을 손으로 걷어내며 손이 시리기보다 어머니 품속 같은 온기를 느꼈다. 유씨의 시묘살이는 23년 전 결심했던 일이었다. 그는 부모님 제사를 모셔야 하는 장남도 아니다. 자신에게 목수일을 가르쳐 준 열세살 위 형님이 있다.

"1980년 추석 그해 초 돌아가신 아버지 묘소를 돌보며 밤을 새우고 집에 돌아왔습니다. 어머니가 어찌나 기뻐하시던지. 그때 어머니가 돌아가시면 '시묘살이'를 하겠다고 다짐했습니다."

전국을 돌며 목수일을 하던 그는 각지에서 만나는 노인들에게서 언제 시작될지 모르는 시묘에 대한 지식을 쌓았고, 시묘살이 동안 가족들이 생활하는 데 불편함이 없도록 돈도 저축했다.

그러나 정작 어머니가 돌아가실 때 건축 현장에서 부상해 병원신세를 지고 있어 임종하지 못했다. 1년이 지나 퇴원하고 곧바로 시묘살이에 들어갔다. 주위에서 "가족은 팽개치고 자신만 효도하면 되느냐"는 곱지 않은 시선을 보냈다. 어떤 이는 "살아계실 때 불효하고 웬 난리냐"고 말했다.

이런 비난에 대해 柳씨는 "부모 은덕을 소중히 여기는 전래의 효교육이 계속됐다면 요즘 같은 패륜적 범죄는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지난해 여름 그의 시묘가 세상에 알려진 후 柳씨의 시묘 현장에 하루 평균 10여명씩 '관람객'이 찾아온다. 柳씨가 매일 쓰는 일기에 따르면 이미 4천8백명을 넘어섰다. 자녀를 데려오는 부모, 학생들을 인솔해 오는 교사 등 다양하다. 전국에서 걸려오는 문의 전화에 서산시가 이곳에 '시묘장소'표지판을 세울 정도다.

柳씨를 찾는 사람들은 제각기 부모상(喪)과 관련된 애틋한 사연을 갖고 온다.

올해 초 상복을 입은 중년의 남매 네명은 "오늘은 부친의 삼우제(三虞祭)날인데 형제 간에 탈상(脫喪)시기를 놓고 말다툼을 벌였다"며 柳씨를 찾았다. "사람은 최소한 생후 3년간은 부모 보살핌을 받아야만 생존할 수 있다"는 柳씨의 '3년 시묘'이유를 듣고 그들은 탈상을 49제(齋) 때까지 미루기로 했다.

그는 2005년 5월 시묘가 끝나면 책을 쓸 생각이다. 찾아오는 사람들마다 시묘는 왜 하는지, 어떻게 하는 건지 알려주는 책이 없다고 말하기 때문이다. 그는 "효는 부모 걱정을 덜어주는 데서 출발한다"고 말했다. 그는 움막 입구에 명심보감 한구절을 적은 팻말을 세워놓았다. '부모가 계시거든 멀리 떠나지 말며 가더라도 행선지를 꼭 알려라.'

서산=조한필 기자

*** 바로잡습니다

12월 11일자 27면 '부모에게서 멀리 떠나는 것도 불효' 기사 중 '49제'는 '49재'의 오기이기에 바로잡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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