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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범도 "「청산리 승리」주도적 역할"|독립운동사연 장세윤씨 논문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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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3면

「백두산 호랑이」로 불리는 독립운동의 영웅 홍범도 장군의 활동을 재조명하는 학계의 노력이 활발하다.
홍 장군은 전설적 영웅으로 칭송돼 왔지만 그의 활동은 체계적으로 정확하게 알려지지 못해 왔다. 그의 활동이 워낙 광범위하고 장구하게 이뤄져 왔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기본적으로는 그에 대한 연구자료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최근 중앙아시아지역과 연변지역의 자료가 속속 입수되면서 홍 장군에 대한 연구가 자연히 활기를 띠게 되었다.
최근의 연구로 가장 주목되는 것은 홍 장군이 직접 쓴 수기를 최초로 분석해 기존의 잘못된 인식을 바로잡고자 한 장세윤씨(독립운동사연구소 연구원)의 논문이다. 장씨는 해외학자인 고송무 교수(헬싱키 대)를 통해 국내에 알려진 홍장군의 회고록(통칭 홍범도일지)을 통해 본 그의 일생과 항일무장투쟁에 관한 글을 『한국독립운동사연구』최근호인 제5집에 발표했다.
일지를 통해 새롭게 확인되거나 기존의 연구와 다르게 나타난 중요한 문제점은 크게 세 가지로 정리된다.
첫째는 청산리 전투에서 홍범도 부대가 가장 중요한 역할을 했다는 것이다. 기존 대부분의 연구에서는 청산리 전투에서 공을 세운 것이 김좌진·이범석 등 북로군정서로 기록돼 왔는데 사실과 다르다는 것이 확인된 것이다. 기존의 연구는 자료가 부족한 가운데 초대내각의 국무총리 겸 국방장관을 역임했던 이범석의 증언에 따라 홍장군의 부대는 참가하지 않았거나 도망친 것으로 알려져 왔다. 반면 북한의 역사연구소에서 펴낸『조선 근대혁명운동사』에 서는 청산리 전투를 홍범도 부대 단독수행으로 기술하고 있다.
일지는 북로군정서와 연합하기 위해 청산리로 가다가 일본군과 만나 대승리를 거두었음을 여러 차례 상세히 기록하고 있으며, 당시 일본군만이 아니라 일제의 조종을 받던 중국인마적과도 싸웠음을 밝혀 주고 있다. 일지는 또 당시 많은 피해를 보았음도 솔직하게 밝히고 있는데, 곧 다시 일본군을 습격했다는 점으로 미루어 도망갈 만큼 치명적이지는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둘째는 초기활동의 경우, 항일투쟁인 동시에 반봉건적인 활 빈도 성격도 강했던 것을 알 수 있다. 일지는 부패한 관료나 부호·지주 등에 대한 응징차원의 급습을 많이 기록하고 있다. 이러한 활동은 군자금조달의 필요성에 따른 것도 있었지만 빼앗은 돈을 전쟁에서 가족을 잃은 가난한 동포들에게 나눠주었다는 기록도 많다. 이같은 활동에 따라 그의 부대는 함경도·간도지역의 주민들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며 신출귀몰할 수 있었고, 그는 신과 같은 존재로 추앙 받을 수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셋째로 주목되는 것은 1919년 재기 이후 그는 러시아혁명을 지원하면서 적군과 함께 싸웠다는 기록이다. 기록에 따르면 청산리 전투 직전인 1920년 9월까지 러시아적군출신 빨지 산 3명이 함께 활동했다. 당시 피압박민족의 민족운동을 지원했던 국제세력과의 연대를 확인시켜 주는 증거다. 그는 특히 1921년 독립군부대 대표로 레닌을 만난 사실을 자랑스럽게 기록했는데, 이는 적어도 그가 투철한 공산주의자는 아니더라도 사회주의 이론에 동조한 항일 투쟁 가임을 알게 해준다.
이밖에도 일지를 통해 ▲가족도 항일 운동에 동참, 아내와 큰아들이 희생돼 둘째아들만 남았으며 ▲1868년 평양에서 출생했고 ▲1891년께 금강산 신 계사에서 이충무공 후손인 지담 대사의 상좌로 승려생활을 했다는 점 등 개인사와 독립운동에 대한 생생한 증언들도 다수 확인된다. <오병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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