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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통사무총장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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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7면

민주평화통일자문위원회의 사무총장만큼 「독특한 위상」을 갖고 있는 자리도 없다.
우선 무슨 일을 하는지, 어떤 자리인지 언론에 거의 보도가 안되는 자리 중 하나다.
그렇다고 무슨 비밀스런 업무를 맡고 있는 것도 아니다.
평화통일정책 수립에 관한 대통령의 자문에 응하는 자문위원들의 뒷바라지를 하는 사무처의 장일 뿐이다.
그런데 평통 자체가 정책 결정기관이 아니라 말 그대로의 자문기관이기 때문에 사무총장이 신경을 곤두세워야할 업무는 별로 없다.
규정에 따른 각종 회의를 몇 차례 준비하다 보면 한 해가 지나간다.
때문에 사무총장의 활동상은 언론에 「동정」으로 취급되기 일쑤였고 공보관실은 그나마 이들 신문에 한 줄이라도 실어보려 애써온게 현실이었다.
게다가 평통 자체가 81년 출범 때부터 세인들에게 심어준 「여야외곽조직」이라는 「원죄」 때문에 국회가 열리면 사무총장은 야당으로부터 집중포화를 받아왔다.
국회 대정부 질문에서 평통폐지는 야당의원들의 단골메뉴였다.
특히 87년 6·29선언 뒤에는 일부 여당의원마저 폐지에 동조, 당시 김창식 사무총장이 곤욕을 치르기도 했다.
이처럼 외부에서 볼 때는 「눈길을 끌지 못하는 자리」 「유명무실한 자리」라는 인식을 받고 있고 공무원 사회에서는 뒷전에 밀려난 겉치레 조직에 불과하다. 하지만 경우에 따라서는 발탁을 위한 대기처로, 또는 위로부터 완전히 잊혀진 것은 아니라는 나름대로의 자위기능을 가진게 평통사무총장 자리다.
우선 항열이 높아 장관급이다.
물론 어떤 위치에 있다 보임되느냐, 어떤 권한을 갖고 있느냐에 따라 시각을 달리할 수 있다.
장관급이지만 부하직원은 1백명 남짓하고 다른 부처의 장관처럼 권한도 별로 없다.
권한행사는 커녕 1만여명에 달하는 자문위원들의 뒷바라지하는데서 오는 부담감만 지고 있다.
특히 일부 위원들이 사기·도박·폭행 등의 사건에 연루되면 이를 수습하느라 곤욕을 치러야 한다.
그러나 매일매일 업무수행에 따른 스트레스 없이 장관급을 유지할 수 있다는 점은 생각하기에 따라 「괜찮은 자리」가 될 수도 있다.
이와 함께 평통의장이 대통령이기 때문에 업무보고차 1년에 몇 차례 대통령과의 「독대」가 가능한 자리다.
특히 사무총장이 하기에 따라서는 외부의 「사시」에도 불구하고 나름대로 보람을 느낄 수 있는 자리이기도하다.
통일문제에 대한 시야를 넓힐 수 있는 점, 각계각층 인사와의 인간관계를 형성할 수 있는 점등이 그것이다.
이 같은 독특한 위상 때문에 역대 평통사무총장 자리는 대통령의 「자리안배」용으로 충당됐다는게 일반적 평가다.
초대와 2대까지 평통사무총장은 통일원장관이 겸임했다.
이는 평통의 업무가 통일원과 유사하다는 당시 전두환 대통령의 판단에 따른 것이다.
주인도대사로 있다가 80년9월 통일원장관으로 발탁된 고 이범석씨는 평통탄생의 산파역이었다.
북한의 조국평화통일위원회에 대응하면서 전국적인 「친여조직」이 필요하다는 신군부의 판단에 따라 「평화통일정책자문회의」라는 조직이 입안됐다.
당시 통일원장관으로 재직 중이던 이씨가 관련법안을 제정, 이 기구를 탄생시키면서 초대 사무총장도 겸임했다.
이 총장은 8개월여 동안의 재임기간 중 운영세칙, 시·군·구 협의회 구성 등 평통조직을 마무리지었으며 그 과정에서 능력을 인정받아 대통령 비서실장으로 영전됐다.
그러나 업무추진과정에서 일방적으로 밀어붙이는 등 내부적인 조직관리에서 허점을 드러내 구실수에 오르기도 했다.
내무부차관으로 재직 중 82년1월4일 통일원장관으로 발탁된 손재직씨도 평통사무총장을 겸임했다.
손씨의 이례적인 통일원장관 기용은 당시 통일원장관이나 평통사무총장자리가 대통령의 「자리안배용」이라는 점을 보여준 가장 단적인 실례였다.
그러나 손 총장은 내무관료로서 닦은 치밀성을 발휘, 발족 후 미비했던 평통조직을 다져나갔다.
9천여명에 이르는 위원들의 신상명세를 파악하면서 각종 세미나를 개최, 위원들의 참여의식 및 사명감을 고취시켰다.
해외동포를 대상으로 지역협의회를 조직한 것도 손 총장이었다.
손 총장은 특히 직능대표로 각계 신망 받는 인사를 영입하기 위해 애를 썼다는 평을 받고있다.
영입은 못했지만 김준엽 전 고려대총장과도 접촉했다.
통일원장관직에서 분리해 첫 평통사무총장으로 임명된 서정화씨는 평통의 기틀을 다진 사무총장으로 평가받고 있다.
서 총장은 내무장관에 재직중 의령 경찰관 총기난동사건으로 물러났다가 부임했다.
대통령이 한자리 마련해준 것이다.
손 총장에 이어 내무관료출신이 보임된 것은 전국적으로 퍼져있는 평통의 원활한 조직관리라는 측면이 감안된 것이다.
서 총장은 전두환 전 대통령으로부터 임명장을 받는 자리에서 전 전대통령이 『이 자리는 내무장관 못지 않게 중요한 자리』라고 말했다고 회고했다.
서 총장이 우선적으로 역점을 둔 분야는 분과위원회의 활성화다.
그 결과 성과를 거둔 대표적인 사례는 90년 아시안게임 때 사용됐던 남북한공통국기모형을 제작, 채택된 것을 들 수 있다.
84년 북한이 수재물자를 제공하겠다고 했을 때 이를 평통이 논의, 대통령에게『수용해야한다』고 건의한 일이 있었다.
서 총장은 『당시 확대운영회를 개최, 그 문제를 토론한 결과 6대4 정도로 찬성이 많았다』고 말했다.
물론 이 사안은 전전대통령이 북의 수재물자를 받아야한다는 생각을 갖고 있는 상태에서 평통의 의견을 물어온 것이기 때문에 설사 반대의견이 많았다하더라도 수용쪽으로 결론이 날 가능성이 높았다.
그러나 중요한 대북정책을 수립하는 과정에서 평통의 의견수렴절차를 거쳤다는 것은 의미가 있다고 서 총장은 회고했다.
서 총장은 내무관료출신답게 직원들을 「혹사」시켰으나 세세한 분야까지 간섭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85년 2·12총선 때 평통조직을 여당후보 당선에 활용했다는 비난을 야당으로부터 받으면서 민정당 전국구로 진출했다.
4대 사무총장으로 임명된 김창식씨는 평통폐지라는 운명에 직면했다가 이를 회생시키는 등 홍역을 치렀다.
87년 개헌협상 때 야당으로부터 친여 외곽조직의 폐지요구를 강력히 받은 것이다.
김 총장은 당시 야당의원뿐 아니라 일부 여당의원들조차 폐지에 동조하는 분위기를 알고 평통을 살리기 위해 동분서주했다.
직원들 얘기로는 김 총장이 2백여명에 이르는 의원들을 직접 찾아가 읍소했다고 한다. 금 총장은 당시 ▲서독의 「통독위원회」, 「대만의 대륙광복위원회」 등 분단국에는 평통 같은 국민조직이 있고 ▲북한의 민족통일정치협상전략에 대응할 조직이 필요하다고 의원들을 설득했다. 특히 이 과정에서 김 총장이 호남(강진)출신이라는 점이 야당의원들의 「노기」를 진정시키는데 일조했다.
이 같은 김 총장의 호소와 야당도 평통같은 조직이 나름대로 필요하다는 판단 등으로 평통은 대통령선거인단으로 구성됐던 지역대표를 지방의회 의원들로 대체시키는 등 운영을 개선하는 선에서 존속키로 결론이 났다.
청와대 정무2수석으로 있다가 사무총장으로 부임한 김총장은 5년간 재직하고 교통부장관으로 영전됐다.
13대 총선에서 낙선, 2년여 동안 쉬다가 90년3월 사무총장으로 임명된 5대 현경대 총장은 정치인답게 「인화」에 신경을 쓰다 14대 출마를 위해 스스로 그만두었다.
현 총장의 기용 역시 대통령의 「자리안배」였다.
업무적으로는 특기할만한 사안이 없는 현 총장은 그 대신 직원들의 복지향상에는 힘썼다는 평을 받고있다.
대학생자녀를 둔 6급 이하 직원들에게 학비를 제공하고 직원상조회를 구성한 것 등이 그 예다. <안희창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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