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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지영 가족 소설 - 즐거운 나의 집 [1부] 여름 (19)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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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그림=김태헌

여름은 진초록 색으로 B시를 물들이고 있었다. 태양은 프라이팬에서 오래 익힌 노란 팬케이크처럼 지글거렸고, 대기는 늘 후텁지근했다. 그 무더위 속에서 나는 엄마랑 팔짱을 끼고 장도 보러 갔고 전철역 근처의 좌판에서 귀걸이도 하나씩 사서 걸었다. 때로는 엄마하고 동생들하고 이렇게 네 식구가 반바지를 입고 집 앞에 있는 월남국수나 곱창구이를 먹으러 가기도 했다. 그러면서 우리는 우리 둘이 닮았다는 사실 만큼 서로가 닮지 않았다는 사실을 조금씩 확인해가고 있었다. 작게는 이런 것이었다.

"야아, 오늘 날씨 좋다…. 엄마는 여름이 좋아. 태양은 뜨겁고 이파리는 진한 푸른빛이고 건조한 바람이 쌩쌩 부는 거…. 오늘이 딱 그런 날이네. 어때 위녕 너무 좋지?"

"아니, 난 싫어. 난 음산하고 춥고 구름이 하늘을 가득 덮고 비 뿌리는 게 좋아."

내가 대답하자 엄마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나를 바라보았다.

"세상에, 어떻게 그런 날을 좋아할 수가 있어? 너 참 별나다."

그러면 나도 눈을 동그랗게 뜨고 엄마에게 대꾸했다.

"세상에, 어떻게 여름날을, 것도 태양이 뜨거운 날을 좋아할 수가 있어? 게다가 작가가…. 참 별나네."

"아니, 작가가 맑은 날 좋아하는 게 뭐가 어때서 그래? 생각해 봐, 심지어 고기압이 다가와 맑은 날이 되면 일기예보에서 좋은 날씨라고 해, 전 세계에서 다 그런다구."

"사람들이 그러든지 일기예보에서 그러든지, 난 춥고 흐린 날이 좋아. 그리고 싫어하는 사람도 있는데 맑은 날을 좋은 날씨라고 판단해버리는 건 횡포잖아. 엄마가 사람들이 서로 다른 걸 존중하는 사회가 좋은 사회라며?"

우리는 서로 고개를 다른 쪽으로 돌리고는, 참 별일이 다 있네, 하고 중얼거리다가 그 말을 똑같이 내뱉었다는 사실을 깨닫고 한 길거리에서 깔깔거리며 웃었다. 엄마가 염려한 대로 혹은 내가 두려워하던 대로 우리는 우리의 결정이 좋은 것이 되기 위해 별로 노력할 필요도 없었다. 우리는 어린 시절부터 옆집에서 자라나서 우정이라는 말을 굳이 꺼내지 않아도 서로를 가장 깊은 자리에 기억하고 있던 친구처럼 서로를 알고 있다고 생각했고, 그래서 편안했다. 엄마에게 무슨 말이든 다 할 수 있었고, 또 엄마도 내가 묻는 모든 말에 대답했다. 하지만 나는 한 가지만은 묻지 않았는데, 그 이유는 나도 아직은 다 알 수 없었다.

내가 이곳에 온 지 한 달이 다 되어가고 있었지만 아빠는 아직 나를 보러 오지 않고 있었다. 나는 가끔씩 아빠가 너무나 보고 싶었고 내가 아빠를 떠난 것이었지만 거꾸로 아빠에게 버림을 받은 건 아닐까, 하는 두려움이 저 깊은 곳에서 솟구쳐 올라와 당황스럽기도 했다. 어찌되었든 나는 아직은 아빠의 옷자락 끝을 마음속으로 움켜쥐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뒤집어 이야기하면 그것은 자로 잰 듯한 아빠와는 달리, 그러니까 이렇게 말하면 어떻게 나올지 다 알 수 있는 아빠와는 달리, 엄마의 바람 같은 마음을 내가 다 믿지 못하고 있었다는 말도 될 것이다.

엄마는 가끔 저녁 약속이 있다며 나갔다가 늦은 밤 귀가했다. 엄마가 저녁 약속이 있는 날이나 여행을 떠나야 하는 날 우리들을 돌보아주는 엄마의 선배 서저마가 동생들을 재우고 잠이 들면 나는 늦도록 책을 읽었다. 이상하게도 엄마가 돌아올 때까지 잠이 오지 않았다. 그런 밤이면 내 열린 창으로 어느 집에선가 아이가 우는 소리가 들리기도 했는데 그때 내 마음속에서 아직도 자라지 않은 작은 아기도 잠에서 깨어나 함께 울었다. 아빠가 어린 시절 '해님달님'이라는 동화책을 우리집에서 치워버렸던 기억이 났다. 내 마음속의 아기는, 밤이면 옆자리가 허전해서 깨어나 울던 아기는, 아직도 호랑이를 무서워하고 있었나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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