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술|마르크스이론 비판 확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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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3면

올해 학계는 사회주의모국 소련의 소멸이라는 세기적 사건에 따른 사회주의 이념과 이론, 곧 마르크시즘연구에 대한 비관과 반성이라는 거대한 흐름으로 특징지어진다.
현실 사회주의국가의 몰락은 국내 학계의 사회주의에 대한 연구열과 기대를 순식간에 변질시켰다. 물론 사회주의에 대한 열의는 이미 페레스트로이카가 시작되면서부터 냉각돼왔다. 하지만 올해는 냉각돼오던 관심을 결정적으로 변화시킨 일종의 지성사적 분수령으로 기록될만하다. 『소련의 개혁이 과연 본래의 사회주의로 가고있는 것인가』라는 미련섞인 성격논쟁의 차원을 떠나 『현실 사회주의는 분명 실패했구나』라는 결론이 내려진 해였기 때문이다.
지식인층의 심상찮은 변화는 연초 대표적인 진보학자의 고백적 주제발표로 포착되기 시작했다. 냉전의 시대에 알려질 수 없었던 사회주의사회의 인간적 면모를 국내에 처음 소개해 충격을 던졌던 「전환시대의 논객」 이영희교수(한양대)가 한국정치연구회 주최 세미나에서『현실 사회주의는 실패했다』고 고백했던 것이다.
물론 이교수의 고백은 당시까지도 기세를 굽히지 않았던 진보적 소강학자들로부터 「성급한 패배주의」라는 비판과 반발을 받았다. 하지만 현실로 급진전되는 사회주의국가의 몰락은 거스를 수 없는 대세로 학계의 인식을 바꿔갔다.
새로운 인식은 당연히 실패한 소련식 정통마르크시즘에 대한 비판이었으며, 이는 수정된 마르크시즘에 대한관심으로 이어졌다. 수정주의자 베른슈타인 등에 대한연구가 활기를 띠기 시작했으며 수정된 사회주의의 현실적 구현체인 스웨덴 등 서구복지국가의 사회민주주의가 관심을 모았다. 보다 철학적인 차원에서 마르크시즘적 시각을 견지하면서도 서구사회에 적합한 이론으로 발전해 온 후기마르크시즘 이론연구도 급속히 확산되기 시작했다.
동시에 새롭게 형성되기 시작한 탈냉전의 신국제 질서와 이에 따른 한반도의 상황변화는 보다 현실적인 차원에서 남북관계에 대한 관심을 자극했다. 사회과학자들은 통일된 한반도의 미래상을 연구하기 시작했으며, 통일을 준비하기 위해 어떤 일들을 해야할 것인가를 찾았다. 남북협상이 급진전되면서 최대의 걸림돌인 핵을 어떻게 볼 것인가, 협정내용과 상치되는 법을 어떻게 고칠 것인가도 논의되기 시작했다.
이데올로기가 쇠퇴하면서 한편에서는 정형화된 가치체계를 부정하는 포스트모더니즘이 새로운 사회이론으로 부상했으며, 다른 한편에서는 심각해져 가는 환경문제를 연구하는 신과학운동(녹색이론)도 자리 잡기 시작했다. 인문과학, 특히 역사학분야에서 진보적 연구경향을 비판하는 보수학자의 목소리가 높았던 것도 이데올로기 쇠퇴에 따른 분위기 변화를 특징짓는 현상으로 꼽힌다.
이와 함께 남북 학자간의 교류도 빈번해져 지난 여름방학중 연변에서는 남북학자들이 만나는 국제회의가 이어졌다. 하지만 서울에서 열린 「한민족 철학자대회」에 초청된 북한학자는 오지 않았다. 해외에서의 만남은 늘었지만 한반도 내에서의 만남이라는 직접교류는 이뤄지지 못해 아쉬웠다.
반면 이상의 해빙무드와 무관하게 오히려 이에 역행하는 사건이 지난 6월 서울사회과학연구소 연구원 무더기구속이 있다. 논문이 「국가보안법위반」이라는 혐의로 구속돼 「학문과 사상의 자유」 침해논쟁을 불러 일으켰다. 서울대 교수모임인 「사회정의연구 실천 모임」 등이 『학문연구의 범위를 벗어나지 않았다』고 변호했음에도 불구하고 26일 유죄판결이 내려져 학술활동에 대한 관의 제약이라는 현실의 엄존을 재확인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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