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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eek&CoverStory] 명품이 날개?

중앙일보

입력

모델=송경아 협찬=샤넬·구찌

세계 무대에서 활약 중인 톱모델 송경아씨. 늘씬한 키며 가느다란 팔다리하며, 참 부럽죠? 하지만 여성이라면 지금 그녀의 멋진 몸매를 감싸고 있는 의상과 가방에 더 눈이 갈지 모르겠습니다. 예쁜 옷, 근사한 액세서리를 마다할 여자가 얼마나 될까요. 그것도 세계적으로 이름난 명품 브랜드라면 말이에요. 이번 주 week&은 명품 얘기를 해 볼까 합니다. 특정 브랜드 핸드백이 요즘 왜 그리 많이 팔리는지, 수십만원을 들여 열쇠고리 하나 달랑 사는 심리는 무엇인지. 취재 하느라 명품 옷.구두.가방을 실컷 만져 봤습니다. 황홀하더군요. 한편 허무했습니다. 가지면 배부를 것 같지만, 가질수록 더 배고파지는 명품의 세계. 살짝 들여다 볼까요.

글=홍주연 기자 사진=권혁재 전문기자 shotgun@joongang.co.kr>

회사원 서모(29)씨는 최근 오랫동안 원했던 루이뷔통 핸드백을 드디어 손에 넣었다. 지난 1월 국내 면세점에서 특유의 '모노그램' 무늬가 들어간 가방을 80만원에 구입한 것이다. 서씨는 이 핸드백을 사기 위해 6개월 동안 돈을 모았다. "꼭 갖고 싶었어요. 아무 옷에나 들 수 있고 오래 쓸 수 있으니까요." 친구들이 너나 없이 루이뷔통 가방을 갖고 있는 것도 자극이 됐다. "이 가방을 들면 어깨가 으쓱해지는 것 같아요. 루이뷔통은 루이뷔통이잖아요."

회사에서 멋쟁이로 통하는 노모(30)씨는 이와 반대다. 그는 몇 년 전 구입한 루이뷔통 가방을 옷장 깊숙이 넣어버렸다. 대신 프랑스 출장길에 산 클로에 핸드백을 메고 다닌다. "어딜 가나 루이뷔통이에요. 너무 많이 갖고 있으니 희소가치가 없잖아요."

명품 브랜드 루이뷔통의 인기가 대단하다. 업계에서는 루이뷔통이 지난해 1000억원 상당의 매출로 국내에 진출한 명품 브랜드 중 1위를 차지했다고 추정한다. 면세점 매출은 이보다 더 많은 것으로 알려졌다. 매출 성장세도 가파르다. 주요 백화점에 따르면 루이뷔통 매장의 올해 매출은 지난해 같은 기간보다 15~20% 더 올랐다. 롯데백화점 명품관 에비뉴엘은 '루이뷔통 효과'를 톡톡히 본 경우다. 2005년 7월 루이뷔통 매장이 문을 연 뒤 명품관 전체 매출이 이전보다 두 배 이상 뛰었다.

프랑스 LVMH가 운영하는 루이뷔통은 핸드백으로 유명한 브랜드다. 샤넬.에르메스와 함께 '프리미엄 명품'으로도 불린다. 가격 역시 만만치 않다. 면세점을 제외한 국내 매장에선 핸드백 하나에 적어도 100만원은 줘야 한다. 그런데도 한국에서 루이뷔통의 매출은 계속 올라가고 있다. 이유가 무엇일까.

업계에서는 '명품의 대중화'를 그 이유로 꼽는다. 지난해 주요 백화점의 명품 매출은 2005년보다 10~20%씩 올랐다. 시장이 커졌다는 건 명품 소비자가 늘었다는 뜻이다. 롯데백화점 하성동 에비뉴엘 팀장은 "이제 명품은 부유층의 전유물이 아니다. 주부.직장여성.대학생 등 중산층 고객의 비중이 날로 커지고 있다"고 말했다. 그중 루이뷔통은 높은 가격에도 불구하고 가장 대중적인 브랜드로서의 입지를 다져가고 있다. '명품 초보자'도 편하게 접근할 수 있다는 뜻이다. "루이뷔통 고객의 30% 정도를 '명품 입문자'로 봅니다. 루이뷔통은 로고가 잘 보이고 디자인이 무난해 초보자들이 좋아하죠." 신세계인터내셔날(SI) 정준호 상무는 말했다.

한 명품업체 관계자는 명품 소비자를 다음과 같이 분류했다. "'청담동 고객'은 남이 잘 모르는 명품을 원하고, '압구정동 고객'은 보수적이며 럭셔리한 옷을 좋아하죠. 초보자들은 남들 눈에 잘 띄는 핸드백을 사는 걸로 명품 세계에 입문합니다."

백화점들 '루이뷔통 효과' 톡톡

명품 구매 비용에 대한 소비자들의 '심리적 하한선'도 점차 올라가고 있다. "남과 같은 제품으로는 자신을 차별화할 수 없습니다. 그렇다 보니 점점 더 비싼 브랜드를 찾게 되는 거죠. 1990년대 중반 버버리에서 페라가모를 거쳐 지금의 루이뷔통까지요." 갤러리아백화점 김덕희 명품팀장의 말이다. 일하는 여성이 늘어난 것도 명품 대중화에 한몫했다. '도나카렌'의 함혜원 과장은 "상당수 고객이 전문직에 종사하는 30~40대 여성"이라며 "일하는 여성들은 사회생활을 위해서도 자신에게 투자할 필요를 느끼는 듯하다"고 말했다.

신세계백화점 해외명품팀 손영식 부장은 "유럽 문화를 동경하는 일본에서는 10년 전부터 루이뷔통이 인기였다"며 "명품이란 말도 일본에서 온 것처럼 국내 시장도 일본의 영향이 컸다" 고 말했다.

적극적 마케팅도 대중화 한몫

루이뷔통 측도 적극적인 대중화 전략을 썼다. 루이뷔통 한국지사는 고객층 확대를 위해 ▶매장 직원에게 친절 교육을 강화하고 ▶연예인 협찬에 적극 나서며 ▶제품 수선 기간을 한 달에서 2주로 단축하는 등의 노력을 기울였다. 이 회사 관계자는 "매장 직원들이 잘 차려입은 손님만 상대하던 것은 옛날 일"이라며 "창고 면적도 늘려 고객들이 원하는 제품을 빨리 볼 수 있도록 했다"고 말했다.

명품 대중화는 설문 조사에서도 나타났다. 본지가 여성전문 포털사이트 팟찌(www.patzzi.com)의 회원 1043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응답자 10명 중 9명(89%)이 "명품을 갖고 있다"고 답했다. 이들이 갖고 있는 브랜드는 ▶버버리(30%) ▶루이뷔통(29%) ▶샤넬(28%) ▶구찌(26%.이상 복수응답) 등이었다. 명품을 사는 이유로는'유행을 타지 않아서(34%)', '디자인이 예뻐서(21%)', '자부심을 높여주니까(19%)' 등을 들었다.

홍보회사에 다니는 이모(34)씨도 10여 개의 명품 핸드백이 있지만 사치를 부린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명품 가방은 오래 쓸 수 있어 좋아요. 디자인도 세련되고요. 무엇보다 열심히 일한 내게 특별한 선물을 한 느낌이라 기분이 좋죠." 주부 최모(55.서울 옥수동)씨는 남들 눈 때문에 명품을 산다고 했다. "요즘 친구 모임에 가면 '센존 정장에 루이뷔통 가방'이 유니폼이에요. (명품이)비싸다고는 생각하지만 남들보다 뒤처져 보이는 것도 싫어요."

"브랜드보다 개성 중시해야"

명품 열기에 대한 시선은 다양하다. 톱 모델 송경아(28)씨는 뉴욕.파리.밀라노 컬렉션에서 수백 벌의 명품 옷을 입고 무대에 섰다. "명품 중에는 분명 디자인 좋고 재단이 입체적인 옷들이 많아요. 하지만 일부는 원단이며 품질에 비해 가격이 너무 비싸죠. 게다가 우리나라에 들어오면 이런저런 비용으로 값이 두 배 가까이 뛰어오릅니다." 송씨의 지적이다. 에르메스 코리아 박상욱 이사는 "일부 소비자는 취향에 자신감이 부족해서인지 브랜드에 더 열광하는 것 같다. 개성 있는 상품보다 다른 이들이 많이 사는 제품을 선호한다" 고 말했다.

서울대 소비자학과 김난도 교수는 "명품으로 자신을 표현하려다 보면 갈수록 비싼 제품에 집착하게 된다"며 "사회.경제적으로 바람직하지 않은 현상"이라고 말했다.

국내 명품시장의 어제.오늘

1988년 첫 매장 → 90년대 중반 버버리 돌풍

→ 97년 외환위기 이후 에트로.페라가모 인기

소위 '명품' 트렌드도 시대에 따라 변한다. 국내 백화점이 명품 매장을 연 것은 1988년의 일이다. 해외여행 자유화에 맞춰 서울 압구정동 현대백화점 본점에 관련 매장이 첫선을 보였다. 당시 미소니.발렌티노.베르사체 등 의류 브랜드가 인기를 끌었다.

90년대 들어 주요 브랜드가 속속 한국에 상륙했다. 명품의 대표 격인 루이뷔통과 샤넬이 90년대 중반에 각각 한국 지사를 설립했다. 체크무늬 목도리로 유명한 버버리가 90년대 중반 폭발적인 인기를 끌었다.

97년 말 외환위기는 명품 시장의 판세를 바꿔놓았다. 일부 수입업체들이 부도를 내며 쓰러졌다. 이는 명품업체들이 한국에 직접 진출하는 계기가 됐다. 소비의 양극화가 가속화한 것도 이때다. 꽈배기처럼 생긴 '페이즐리' 무늬의 에트로 핸드백과 말발굽 모양의 '간치니' 장식이 붙은 페라가모 구두는 일명 '청담동 며느리 패션'으로 불리며 인기를 누렸다.

2000년대는 다양한 브랜드를 취급하는 멀티숍의 시대다. 신세계인터내셔날이 2000년 국내 1호 멀티숍인 '분더숍'을 열었다. 돌체&가바나.비비안웨스트우드.마르니 등 대중에게 생소한 브랜드가 인기를 끌었고 남성 소비자도 늘어났다. 신세계인터내셔날 정준호 상무는 "과거엔 중년 여성을 겨냥한 옷만 인기였다. 요즘은 젊은층과 남성들 취향의 상품도 잘 팔린다"고 말했다.

홍주연 기자

명품 열기의 심리학

지위 드러내는 차별화 수단으로

"현재를 즐기자" 가치관도 변화

월급을 탈탈 털어 100만원이 넘는 명품 핸드백을 사는 여성들. 남성들은 도통 이해할 수 없다. 전문가들은 이런 심리를 남자들이 멋진 자동차에 열광하는 것에 빗대어 설명한다. "사람들은 소비를 통해 자신을 나타내고 싶어하죠. 여성들은 핸드백과 구두, 젊은층은 고급 휴대전화에 자신을 투사합니다." 서울대 소비자학과 김난도 교수의 말이다. 김 교수는 이 같은 '투사 상품'의 특징이 ▶밖으로 드러내 사용하고 ▶몸에 항상 붙이고 다니며 ▶남의 눈에 잘 보이는 것들이라고 소개했다. 전문가들은 또 '베블렌 효과(Veblen Effect)'로 명품 소비를 설명한다. 가격이 비쌀수록 수요가 줄어드는 일반 상품과 달리 특정 제품은 가격이 오를수록 수요가 늘어난다. 상류층은 지위를 표현하기 위해 명품을 사고 중산층도 이를 따라잡기 위해 구매에 나선다는 것이다.

명품 열기를 계급 사회의 붕괴로 설명하는 의견도 있다. 일제 강점기와 한국전쟁을 거치며 전통적인 계급 사회가 무너진 뒤, 명품이 상류층의 상징으로 여겨지기 시작했다. 한 명품업체 관계자는 "귀족 사회의 잔재가 남아있는 유럽에서는 중산층이 명품에 집착하지 않는다. 한국 중산층은 돈이 많으면 계급도 뛰어넘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때문에 상류층의 상징인 명품을 적극적으로 사는 것"이라고 말했다.

소비에 대한 인식도 바뀌었다. 건국대 신경정신과 하지현 교수는 "과거엔 사람들이 미래를 위해 현재를 투자했지만 요즘은 미래에 쓸 돈을 현재를 위해 쓴다. 20평형대 아파트에 전세 살면서 외제차를 타거나, 월급을 저축하는 대신 비싼 핸드백을 사는 것도 비슷한 심리"라고 말했다.

홍주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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