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어령 말의 정치학] 끝. 非常口와 太平門 그리고 民族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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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 초등학교 국어책에 제일 먼저 나오는 글이 '바둑아 바둑아, 나하고 놀자'였다. 엄격한 의미로 바둑이는 고유한 개 이름이라곤 할 수 없다. 바둑알처럼 희고 검은 털이 박힌 개면 다 바둑이다. 그래도 바둑이는 나은 편이다. 옛날 시골 개 이름들은 거의 모두가 멍멍이다. 멍멍하고 짖으니까 그냥 멍멍이라고 이름을 붙인 것이다.

같은 문, 같은 한자로 이름 붙인 것인데도 한국과 일본은 비상구(非常口)라 하고, 중국은 정반대로 태평문(太平門)이라고 부른다. 그리고 우리는 자기의 직장 내 비리를 고발하는 사람을 밀고자라고 부르지만 미국에서는 휘슬 블로어(호루라기 부는 사람)라고 한다. 이름 하나로 부도덕한 밀고자가 다른 곳에서는 반칙한 선수에게 경고의 호루라기를 부는 당당한 심판자가 된다.

정치적인 시선과 그 행위는 언제나 이름 짓기, 이름 부르기에서 시작된다. 그래서 한쪽에서 의식화라고 부르는 것을 반대편에서는 세뇌화(洗腦化)라고 한다. 다양한 의견은 중구난방, 자유경쟁은 약육강식이 되고 사소한 일상적 언어표현에서도 신중한 사람은 우유부단한 사람, 신념은 고집불통, 열정은 광기로 각기 평가의 수식어가 달라진다.

대선자금이니 신임 문제니 하는 뜨거운 정치적 쟁점에 비하면 말이나 이름을 따지는 것은 한가로운 일로 보일지 모른다. 하지만 부패 부정은 정치의식과 방향을 결정짓는 말과 이름의 근원적 문제에 비하면 그야말로 수족에 난 종기에 불과한 것이다.

뇌가 마비되면 아무리 사지가 멀쩡해도 식물인간이 되고 만다. 지하철이나 버스를 탈 때 누구나 그것이 어디로 가는지 알기 위해 표지판(이름)을 본다. 아무리 빈 차가 와도 방향이 다르면 타지 않고 아무리 만원이라도 원하는 방향이면 매달려서라도 탄다.

그렇게 중요한 말과 그 개념들이 이 연재 칼럼을 통해 보아 온 것처럼 서구 사상을 처음 들여올 때 일본 사람들이 지어낸 번역어라는 점이다. 우리가 거의 신성불가침처럼 사용하는 '민족(民族)'이란 말마저 제국주의화를 꿈꾸던 일본인들이 만들어낸 관념어라면 그 충격은 크다.

"유럽어의 번역어와 달리 民族이란 말은 20세기 초 메이지(明治) 말 일본에서 태어난 순 국산어다. 현대 중국어의 민즈나 한국어의 민족도 일본어 民族의 차용이다. 그래서 일본어의 民族에 정확히 들어맞는 유럽어가 없다. …내셔널리즘을 민족주의라고 번역하지만 내셔널 유니버시티는 민족대학이 아니라 국립대학이라고 한다." 이렇게 주장하는 일본인 학자들에 대해 우리는 분명히 무엇인가 대답할 수 있어야 한다.

그들 이전에 우리가 민족이라는 말을 사용했다면 그 기록을 찾아내 증거로 제시해야 할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오늘날 우리가 사용하는 민족이란 말이 그들이 만들었다는 그것과 어떻게 다른 개념을 지니고 있는지 분명히 밝혀내야 할 것이다.

바둑이나 멍멍이 같은 어정쩡한 이름 짓기.이름 부르기에서 탈피하는 것, 그것이 길을 잃은 우리 정치가 찾아야 할 원점이다.

*** 말의 정치학을 끝냅니다. 장수 제한과 칼럼이라는 특성상 인용문의 출전과 참고문헌 등을 밝히지 못한 것을 양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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