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학규 탈당, 명분과 변절 사이 … 큰 도박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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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분석 손학규 전 경기지사는 19일 자신이 몸담았던 한나라당을 향해 '군정 잔당' '독재 잔재'라고 독설을 퍼부었다. 독설은 그가 탈당한 명분이기도 했다. 지난 10여 년간 손 전 지사가 좀처럼 입에 담지 않았던 용어들이다. 1993년 민자당 보궐선거로 정치권에 입문하기 전까지 그가 걸었던 '운동권 손학규'의 모습으로 되돌아간 듯했다.

국회의원으로, 보건복지부 장관으로, 경기지사로, 대선주자로 그는 14년을 '보수 정당' 한나라당에 몸담았다. 그는 기자회견에서 '중도세력의 중도정치'를 내세웠다. 좌파 운동권 출신 학자에서 보수 정당의 중심인물로, 다시 중도 노선으로. 그의 이념적 지향점은 이렇게 바뀌고 있다. 손 전 지사의 변신이 '거대한 정치적 도박'이라는 얘기는 그래서 나온다.

그가 내건 명분을 변절로 보는 차가운 시각도 있다. 방법론적으로 그는 '97년 이인제 의원'의 길을 택했다. 손 전 지사가 이날 띄운 승부수는 성공할까. 승부수가 성공하기 위해 손 전 지사가 넘어야 할 가장 큰 장애물은 그가 뿌려 놓은 말들이다.

그는 탈당 회견에서 "한나라당에 등을 돌리지 않기 위해 대한민국의 장래와 국민의 희망에 등을 돌릴 수는 없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탈당 선언 10여 일 전에 그는 "한나라당이 대선에서 최종적으로 승리할 수 있도록 만드는 것이 내 목적이고 역할"이라고 말했었다. 한겨레 신문과의 인터뷰에서다.

<말말말 참조>

"탈당하겠느냐는 질문은 다른 사람에게 먼저 물어본 뒤 나에겐 가장 나중에 하라" "손학규의 입을 보지 말고 살아온 길을 봐라. 나는 지금껏 한나라당을 지켜온 기둥이자 주인, 미래다"….

고건 전 총리가 전격적으로 대선 불출마를 선언한 다음 날인 1월 17일, 그는 "내가 벽돌도 아닌데 어떻게 빼서 (여권 후보로) 넣겠느냐. 한나라당을 커다란 용광로로 만들 것이다"고 했다.

숭실대 강원택 교수는 "말을 바꾼 것은 손 전 지사의 정치적 부담으로 남을 것"이라며 "처음부터 분명하게 자기 입장을 밝히지 않고 상황논리에 따라 입장을 결정했다는 비판을 피하기 어려울 것"이라고 지적했다.

올해 대선의 가장 큰 특징 중 하나는 '이인제 학습효과'라는 분석이 많다. 탈당한 대선 주자는 본선에서 승자가 될 수 없다는 경험칙이다. 그런데 손 전 지사는 이 의원의 길을 선택했다. 한나라당 관계자는 "97년 이 의원처럼 경선 후 탈당이 아니라 경선 전 탈당이란 점에 차이가 있을 뿐 손 전 지사는 이 의원의 한계를 넘어서지 못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손 전 지사도 그런 고민을 많이 했다고 한다. 손 전 지사의 한 측근은 "그가 나흘간 설악산 산사를 배회한 것도 탈당 후 어떻게 될지 모를 민심의 향배 때문이 아니었겠느냐"고 말했다. 손 전 지사는 한나라당과 겨룰 범여권의 단일 후보가 되기를 기대할 것이다. 손 전 지사의 탈당을 지지하는 범여권에선 "손 전 지사와 이인제 의원은 다르다. 손 전 지사가 범여권에 돌파구를 열어 줄 수 있다"고 한다.

그러나 다른 쪽에선 "흥행몰이가 절실한 범여권의 희생양이 되고 말 것"이라는 냉소적인 얘기도 있다. 이인제 효과가 손 전 지사를 삼킬 것인지, 손 전 지사가 이인제 효과를 극복할 것인지는 여론이 결정할 것 같다.

서승욱 기자

손학규의 말말말

▶"탈당하겠느냐는 질문은 다른 사람에게 먼저 물어본 뒤 나에겐 가장 나중에 하라."(2006년 6월 6일 동아일보 인터뷰)

▶"내가 벽돌이 아닌데 어떻게 빼서 (여권 후보로) 넣겠느냐."(2007년 1월 17일 충남도당 신년교례회)

▶"당의 분열을 기도하고 약속을 깰 수 있다는 생각 자체가 품격이 낮아지는 것이다."(1월 24일 당 상임고문단 주최 오찬 간담회)

▶"난 한나라당을 자랑스럽고 꿋꿋하게 지켜온 주인이며 기둥이다. 나의 행적을 봐라."(1월 31일 경남도청 기자 간담회)

▶"손학규가 한나라당 수문장으로 대문을 지키고 있는 한 누구도 우리를 수구 보수, 영남당이라고 할 수 없다."(2월 12일 강원도 홍천 당원 간담회)

▶"한나라당이 대선에서 최종적으로 승리할 수 있도록 만드는 것이 내 목적이고 역할이다."(3월 1일 한겨레 인터뷰)

▶"한나라당에 등을 돌리지 않기 위해 대한민국에 등을 돌릴 수는 없다."(3월 19일 탈당 기자회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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