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7화 서울야화(주용만)|타고르의 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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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9면

앞에 나온 진학문의 이야기속에서 중요한 대목을 하나 빠뜨렸으므로 여기서 보충하기로 한다. 인도의 시성 타고르와 한국에 관한 이야기다.
우리들은 보통 타고르가 l929년 4월1일의 동아일보 창간10주년 기념호에 축시를 보내온 것으로 알고 있다.
「처음 일찍이 아시아의 황금시대에 한국은 등불을 든 한 나라이었으니 이제 동방의 광명을 위하여 한번 더 그 빛을 발하기를 기다리노라.」
이런 넉줄의 시였는데, 당시 우리 민족의 암담한 처지에 대한 하늘의 깨우침이라고 해서 우리들은 이 시를 읽고 몹시 흥분하였었다.
그러나 타고르의 격려 메시지는 일반이 알고 있는 것처럼 이것이 첫번째는 아니었다.
사실은 타고르가 이 4행시를 보내기 l0여년 전인 l917년에 최남선이 발행하는 잡지 『청춘』에 「패자의 노래」라는 긴 시를 기고한 일이 있었다.
『청춘』은 그 당시 가장 권위있는 종합잡지였지만 팔리는 부수가 얼마 안되어서 일반 독자의 눈에 띄지 않았을 것이다.
이와 반대로 동아일보는 많은 독자를 가진 일간 신문이었으므로 일반에 널리 알려져서 타고르의 첫번째 투고로 인정된 것이다.
이 때문에 「패자의 노래」가 빛을 못본 것이다.
그러면 어떻게 해서 타고르가『청춘』에 시를 보내게 되었는가.
최남선이 일본에서 돌아와 l908년에 잡지 『소년』을 발간하자 젊은 사람들이 이 새로운 문화기관에 흥미를 갖고 모여들었다.
심우섭·이상협·이광수·진학문등이 글을 써 와서 잡지에 게재하기도 하고 편집을 도와주기도 하였다.
그중에서도 진학문은 집안끼리 아는 터라 제일 가까워서 경리까지 맡았다.
진학문은 공부가 더하고 싶어서 동경에 가 외국어대학 러시아문학과에 입학하였다.
그때가 1916년이었는데 노벨상을 탄 타고르가 세계일주여행을 떠나게 되어 마침 일본에 들르게 되었다.
요코하마(횡빈)의 삼계원에 숙소를 정한 그는 어느날 일본 젊은이들의 간청으로 비공개적인 강연회를 열게되었다.
외국어대학의 일본인 친구의 알선으로 진학문도 그 강연회에 참석하게 되었다.
강연이 끝난 뒤에 진학문은 혼자서 타고르를 만나 한국학생인것을 밝히고 한국과 인도가 같은 처지에 있음을 설명하였다.
타고르는 그것을 잘 안다고 하면서 한국에도 한번 가고싶다고 하였다. 진학문은 이때다 하고 자신이 관계하는 잡지 『청춘』에 시 한편을 줄수 없느냐고 하였다.
타고르는 뜻밖에 선선히 승락하고 주소·성명을 자세히 적은 다음 늦어도 미국여행을 끝낼 때까지 보내주마고 하였다.
이렇게 해서 타고르의 원고가 이듬해 서울 청춘사에 도착하여 1917년 11월호에 게재되었다.
적군의 노래(진학문 번역)주께서 날다려 하시는 말씀외 따른 길가에 홀로 서있어 쫓긴 이의 노래를 부르라시다. 대개 그는 남 모르게 우리님께서 짝 삼고자 구하시는 신부일세니라.
검은 낯가림(면사)으로 가리었었는데 가슴에 찬 구슬이 불빛과 같이 캄캄한 어둔밤에 빛이 나도다. 낮(서)이 그를 버리매 하나님께서 밤을 차지하시고 기다리시니 등이란 등에는 불이 켜졌고 꽃이란 꽃에는 이슬이 매쳤네. 고개를 숙이고 잠잠할 적에 두고 떠난 정다운 집가으로서 바람곁에 통곡하는 소리 들리네.
그러나 별들은 그를 향하여 영원한 사랑의 노래 부르니 괴롭고 부끄러워 낯 붉히도다. 고요한 동방의 문 열리며 오라고 부르는 소리 들리니 만날일 생각하매 마음이 조려 어둡던 그가슴이 자조 뛰도다.
상징적이고 대단히 고무적인 시였다.
한국은 일본에 정복되어 적자의 노래를 부르게 되었지만 이 나라는 하느님의 은총을 받은 나라다.
이제 얼마 안가서 문이 열리고 들어오라는 소리 들릴 것이니 승리의 날을 생각하매 어둡던 가슴이 기쁨으로 뛰도다.
대개 이런 뜻의 상징적인 노래를 통해 타고르는 우리들에게 희망을 준 것이었다.
타고르가 애써 써준 시가 어둠속에 파묻힌 것이 안타까워 이 시를 공개하는 것이다. <고려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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