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지영 가족 소설 - 즐거운 나의 집 [1부] 여름 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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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그림=김태헌

"네 에미 원망하면 안 된다. 네 에미처럼 노력했던 사람은 없어. 할머니도 그만큼 노력하면서 살지는 않았다…. 너를 떠나보내고 난 후, 네 에미가 몹쓸 일을 겪을 때마다 외할아버지하고 나하고 밤새 번갈아 네 에미 방 앞을 지켰다."

외할머니는 내 얼굴을 어루만지며 또 눈물을 흘리셨다. 그제야 외할머니가 엄마의 엄마라는 생각이 들었다. 엄마가 많은 슬픔들을 겪고도 "위녕!" 손을 흔들며 내게 온 것은 어쩌면 밤새 방문 앞에서 서 있던 외할아버지와 외할머니의 숨죽임 때문이었을 거라는 것도 느껴졌다. 액자를 보듬다가 나를 바라보며 우는 외할머니의 얼굴을 보자 엄마와 헤어진 후 슬픈 건 나만이 아니었다는 게 실감이 났다.

바보 같은 생각이었지만 엄마는 그냥 날개옷을 입고 훨훨 날아가버린 줄 알았다. 나무꾼 같은 아빠를 두고 두레박 속에다 나를 팽개치고 하늘로 올라가서 노래하고 춤추고 있을 거라고 생각은 안 했지만 아무튼 그렇다. 그것이 구체적으로 떠오르진 않았어도 내가 줄곧 그렇게 생각해 왔다는 것이 새삼 떠올랐던 거였다. 왜 이런 일들이 벌어진 걸까. 외할머니도 외할아버지도 우리 할머니도 아빠도 모두 좋은 사람들인데. 그리고 모두 나를 이렇게나 사랑한다고들 하는데.

밤은 낯선 B시의 풍경 속으로 촘촘히 내려와 박혔다. 이제 내 방이 된 창가에 서서 그 밤을 내려다보고 서 있자니까 갑자기 엄마의 아파트가 검은 바다를 떠도는 커다란 배처럼 느껴졌다. 고요하고 검은 바다. 엄마가 모는 이 배는 항구까지 잘 도착할 수 있을까. 하다못해 길거리를 걷다가도 다른 생각에 빠져 있다가 잘 넘어지는 엄마에게 이 바다는 친절한 파도만 보내줄 것인가. 엄마가 흔들리면 우리는 어떻게 될까, 하는 두려운 생각이 들어 나는 나를 따라와 이 낯선 방구석에 앉아 있는 밀이와 가루를 양팔에 하나씩 껴안아보았다.

아빠는 뭘 하고 있을까, 하는 생각이 났다. 지금 이 시간이면 아빠는 과일을 먹고 있을 것이다. 한 시간 전에는 정확히 저녁을 먹었을 것이고, 그 한 시간 전에는 퇴근을 했을 것이다. 그리고 한 시간 후에는 책을 읽을 것이다. 아빠의 생활은 자로 잰 듯이 정확했다. 아빠는 늘 시간을 잘 지켰고 말수가 적었다. 화요일에는 출판사로 갔고, 목요일에는 수영을 했다. 오늘은 수요일이니 아빠는 집에서 과일을 먹고 있는 게 맞다. 참 이상하게도 아빠에게 내뱉었던 그 많은 말들이 떠올라 왔다. 그때 아빠가 느꼈을 아픔들도 땅속에 묻혀 있다가 내가 손으로 파면 햇볕을 받아 반짝반짝 빛나던 사금파리들처럼 뾰족뾰족 느껴졌다. 아빠, 미안해… 하는 생각이 나자 아빠에게 내뱉었던 그 뾰족한 사금파리들이 실은 내 가슴속에 있었던 것처럼 가슴이 따끔거렸다.

그래서 나는 얼른 엄마 식으로 생각하기로 했다. 엄마는 언제나 어떤 일의 좋은 점도 있다는 걸 명심하라고 했다. 그래, 좋은 일도 있다. 내가 아빠의 곁에 있을 때는 날마다 다른 일을 하며 사람들을 놀라게 하는 엄마가 무엇을 할지 상상할 수 없었지만 이제 엄마의 집에서 나는 아빠가 무엇을 하는지 다 알고 있으니까. 그러자 이상하게도 아빠와 함께 있을 때는 내게는 숨이 막혔던 아빠의 그 정확함이 좋은 점도 있다는 걸 나는 또 깨닫게 됐다.

그때 밖에서 엄마의 소리가 들렸다. 아까부터 두 남동생을 재우려고 잔소리를 해대더니 이번에는 야단을 치는 것 같았다. 항상 고요하고 규칙적인 아빠의 집에서 살던 내게 이 소란스러움은 실은 약간 불길했고 또 낯설었다. "그래. 컴퓨터 게임이 형제보다 귀중한 거니? 응?" 하는 익숙한 소리에서부터 "니들 이름이 뭐냐?" 하는 난데없는 소리까지 들렸다. 내가 슬그머니 거실로 나가니 엄마는 두 남동생을 나란히 앉혀놓고 있다가 나보고 이리로 와 앉으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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