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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eek& Leisure] 체험 테마가 있는 여행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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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한해 3백만명이 찾는 관광 명소지만 경복궁은 우리네 삶의 흔적이 고스란히 담겨 있습니다. 조선 왕조 얘기만은 아닙니다. 일제를 거치고 군사정권을 지나 오늘에 오기까지. 그 신산(辛酸)하고 부침 심한 시절이 경복궁엔 다 있습니다.

어렵사리 열 곳을 추렸습니다. 물론 이것만으로 경복궁의 모든 것을 설명하진 못합니다. 다른 가볼 만한 곳도 많으니까요. 모처럼 찾은 경복궁에서 멍하니 먼지 쌓인 단청이나 구경할 수는 없겠지요? 경복궁은 지금도 살아 숨쉬는 곳이라는 걸 week&이 알려드리겠습니다.

꼭 명심할 게 있습니다. 궁궐은 '아는 만큼 보이는' 법입니다. 미리 준비해가세요. 또 하나, 눈에 보이는 게 전부는 아닙니다. 옛날로 돌아가 '상상'을 하세요. 그게 궁궐 문을 여는 열쇠랍니다.

1. 철근 콘크리트 구조물 - 광화문

1968년 대한뉴스의 한 장면. "국내 건축 기술이 신기원을 이룩했습니다. 철근과 시멘트 콘크리트로 광화문의 옛 모습을 재현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기뻐해 주십시오, 국민 여러분." 광화문은 공고히 다진 시멘트 콘크리트 구조물이다. 쉽게 말하자면 아파트처럼 지었다. 석축 위의 문루(門樓)는 보이는 것과 달리 나무가 아니다. 의심스러우면 바짝 다가가 보라. 유성 페인트로 위장한 처마 사이사이 콘크리트 모서리가 삐죽이 나와 있다. 어처구니없는 이 사실이 68년엔 자랑스러운 뉴스였다.

대표적인 국가 상징인 광화문. 그래서인지 이 철골 구조물은 굴곡 심한 민족사를 많이 닮았다. 일제는 어떻게든 광화문을 허물려고 했다. 조선의 법궁(法宮) 경복궁의 정문이기 때문이다. 결국 일제는 1926년 광화문을 경복궁 동편으로 옮겼다. 지금의 국립민속박물관 입구쯤이다.

그리고 한국전쟁. 문루는 불타고 석축은 총알받이가 됐다. 임진왜란 이후로 두번째 소실. 그렇게 방치되다 68년 원래의 자리에 철근을 쌓아 올렸다. 그러나 그때도 광화문은 원래의 자리를 찾지 못했다. 광화문의 축을 경복궁에 맞춘 게 아니라 당시 중앙청(옛 조선총독부 청사)에 맞췄기 때문이다. 그 결과 본래의 축과 5.6도 어긋나 세워졌다. 광화문을 등지고 서서 궁궐 안을 바라보자. 광화문과 궁궐 안은 비뚤어진 현대사만큼 어긋나 있다. 자투리 상식 하나. 지금 광화문의 한글 현판은 누구의 필체일까. 박정희 전 대통령이다. 현재 정부는 새 현판 제작을 포함해 광화문의 구조와 위치 모두를 복원하는 정비 사업을 추진 중이다.

2. 경복궁의 두 모습 - 중앙박물관

경복궁을 둘러보기 전에 꼭 들러야 할 곳이 있다. 국립중앙박물관 지하 1층의 경복궁 대형 모형. 1888년 재건됐을 때와 1945년 해방 직후의 몰골이 나란히 누워 있다. 7천칸이 넘는 전각(殿閣)이 빼곡이 들어섰던 고종 때의 위용에 한번 놀라고, 일제가 얼마나 철저히, 그리고 잔인하게 유린했는지 다시 한번 놀란다. 45년 모형에서 광화문이 어디에 붙어있는지 한번 확인해 볼 것.

*** 돌아온 왕조의 존엄 - 근정전

정확히 3년10개월 만이다. 기나긴 보수 공사 끝에 지난달 14일 다시 모습을 드러냈다. 국보 223호. 경복궁에서 가장 높은 건물이다. 2층짜리 돌난간을 합쳐 약 27m. 아파트 8~9층 높이다. 뜻밖의 사실 하나. 조선시대 이 건물은 주로 닫혀 있었다. 왕의 즉위식이나 외국 사신 접견 등 국가의 중요 행사만 여기서 치렀다. 외려 요즘은 날마다 열려 있다. 관광객을 위해서. 물론 출입은 안 된다. 가능하다면 천장의 용 그림을 올려다 볼 것. 목을 길게 빼는 수고를 감내할 만하다. 왕의 평소 집무실은 근정전 바로 뒤의 사정전(思政殿)이다.

통한의 한 장면. 근정전 용상에 왕이 아닌 이가 앉은 적이 한번 있다. 1914년 일제강점 5주년 기념식의 일환으로 경복궁에서 조선물산공진회가 열렸을 때. 데라우치 마사타케(寺內正毅) 초대 조선 총독이었다.

*** 북한 사람이 고개 숙인 곳 - 수정전

수정전은 세종 때 집현전(集賢殿)이 설치됐던 곳이다. 세종 25년(1443년) 훈민정음이 창제된 한글의 메카다. 하지만 요즘 모든 관람객이 그냥 스쳐 지나간다. 그럴 만도 하다. 달랑 서 있는 목조 건물은 사진 배경으로도 약하다. 그런데 이곳에서 머리를 조아린 이들이 있다. 북한 사람들이다. 한글이 여기서 만들어졌다는 설명에 모두가 진지해졌다고 한다. 이들은 사정전 앞의 앙부일구(仰釜日咎.해시계) 곁에서도 한동안 떠나지 않았다.

*** 5. 절대 권력의 향연장 - 경회루

인공 연못 위에 올린 화려한 정자. 24개의 돌기둥이 24절기를 상징하는 등 심오한 철학이 담긴 누각이다. 쓰임새는 사신 접대와 왕의 향연장. 국보 224호다. 경회루에서 아예 살다시피 한 이는 역시 연산군이다. 경회루 왼쪽에 '만세산'이란 섬을 쌓고 금.은.비단으로 장식한 뒤 '초호화 물놀이'를 즐겼다. 당시 기생 집단 '흥청'과 밤낮으로 놀았다고 해서 흥청망청이란 말이 나왔다고.

현대사에서도 경회루는 여전히 절대 권력의 향연장이었다. 79년 12.12 사태 직후 전두환씨가 칵테일 파티를 벌였다는 얘기도 있다.

*** 6. 경회루 옆 정자의 정체 - 하향정

경회루 뒤편 담벼락에 조그만 육각정이 붙어있다. 한둘 들어가면 꽉 찰 것 같다. 뭘까. 경회루를 지키는 초병의 자리일까. 이 정자는 조선 왕조와 상관없다. 이승만 전 대통령의 개인 낚시터였다. 그러고 보니 청와대(당시는 경무대)가 지척이다. 연못엔 셀 수 없을 만큼 많은 물고기가 있다. 적적한 밤이면 예서 낚싯대를 기울였다고 한다. 참고로 하나 더. 경회루 연못엔 동용(銅龍)이 있다. 97년 연못의 물을 뺐을 때 발견됐다. 다시 물에 넣었는데 바로 그 곳이 하향정 왼편이다.

*** 7. 왕비의 한 - 아미산

이름이 예사롭지 않다. 왕비의 침소였던 교태전(交泰展)의 후원이 어떤 연유로 중국 3대 영산(靈山) 중 하나의 이름을 땄을까. 사실 규모도 크지 않다. 4개의 단(段)을 쌓아 꽃나무를 심은 게 전부다. 경회루 연못에서 나온 흙을 여기에 쌓았다. 특이하다면 외려 굴뚝이다(보물 811호). 화려한 문양이 인상적이다.

알고 보니 사연이 깊다. 아미산 뒤로 서 있는 게 백악산(속칭 북악산). 백두산부터 백두대간을 타고 뻗어 내린 정기가 북한산을 거쳐 백악까지 이어진다. 문제는 정기가 백악에서 그친다는 것. 그래서 일부러 산을 올렸다. 끊어진 정기를 궁궐까지, 다시 말해 왕비의 침소까지 잇기 위해. 그래야 백두의 정기를 내려 받은 왕세자를 생산할 수 있으니까. 아미산 감상 포인트 대공개. 교태전 계단의 7할쯤에 올라 아미산을 바라보라. 그 눈 높이가 옛날 교태전에 앉아 내다보던 왕비의 눈 높이, 그 수심 깊던 시선의 시작점이다.

*** 8. 굴뚝은 예술·과학이다 - 자경전

고종이 왕위에 오르는 데 큰 역할을 했던 조대비의 거처가 자경전이다. 그만큼 화려하고 웅대하다. 심지어 굴뚝도 화려하다. 십장생 문양을 새겨 '십장생(十長生) 굴뚝(사진)'이라 불린다. 보물 810호다. 궁궐도 여느 민가처럼 온돌이다. 고개를 조금만 낮추면 아궁이를 볼 수 있다. 그런데 굴뚝이 안 보인다. 궁궐의 굴뚝은 건물에 붙어 있지 않다. 한참 뒤편의 담에 붙어 있다. 혹여 왕족이 연기에 질식되지 않을까 저어해 연통을 지하에 묻고 온돌과 굴뚝을 분리한 것이다. 굴뚝 기와 위의 구멍에서 연기가 나온다. 십장생 굴뚝의 오른쪽 벽면에 박쥐 문양이 있다. '왜 하필 박쥐냐'고 한다면 어릴 적 이솝우화의 과도한 영향을 탓할 수밖에. 박쥐는 동양에서 복(福)의 상징이다.

9. 아! 명성황후 - 명성황후 시해터

그날도 바람이 모질었을까. 1895년 10월 8일 새벽. 일본인 깡패들이 명성황후를 살해했을 때 사실 조선의 역사도, 경복궁의 역사도 거기서 끝이 났다. 살해 위험에 시달리던 고종은 넉달 뒤 러시아 공사관으로 탈출을 감행했고 그 뒤로 경복궁은 왕이 국사를 보는 기능을 상실했다.

명성황후의 시신은 수습되지 못했다. 그날 밤 그들은 왕비의 시신을 ‘녹산’으로 옮겨 불태웠고 잔해를 향원정 일대에 뿌렸다. 시해터는 그래서인지 여전히 을씨년스럽다. 밤낮으로 경복궁을 순찰하는 청와대 경비 경찰도 녹산 일대의 야간 순찰은 꺼린다고 한다.

오늘도 노란 꽃다발이 놓여있는 명성황후 순국 숭모비. 비석 뒷면에 건립위원 명단이 새겨있다. 그 가운데 유독 한 이름만 손때가 심하다. 뜯어내려다 포기한 흔적이 보인다. 누구의 것인지는 직접 확인할 것. 대표적인 친일 여류 문인의 이름을 1961년 숭모비 건립 위원 명단에서 찾을 수 있다.

10. 되풀이되는 침탈의 현장 - 태원전(太元殿) 자리

어떤 곡절이 숨었는지 여긴 군대가 계속 주둔해왔다. 일본군이 물러난 뒤엔 미군, 그리고 한국군까지. 97년이 되서야 군대가 철수했다. 바로 뒤가 청와대란 것과 무관하지 않다.

하지만 태원전은 과거 ‘빈전’(殯展)이 마련됐던 신성한 곳이다. ‘빈전’은 ‘빈소’의 높임말. 왕이 죽으면 능으로 옮기기 전까지 시신을 모시고 의례를 치렀다. 바로 그 곳에 군대가 진을 쳤다.

이곳은 여전히 공사 중이다. 접근도 금지됐다. 멀찍이 지켜봐야 한다. 그저 시시한 공사장 같지만 꼭 그렇지 않다. 경복궁의 북문인 신무문(神武門)에서 50미터쯤 앞 목재가 잔뜩 쌓여있는 곳. 그곳을 주시하라. 1980년 수도경비사단 소속 30경비단의 본부 자리. 12·12를 공모한 바로 그 현장이다. 왜 여기는 복원하지 않는지 모르겠다.

글=손민호 기자
사진=변선구 기자

*** 경복궁 이용 방법

▶가는길=지하철 3호선(경복궁역 5번 출구), 5호선(광화문역 2번 출구)

▶입장 시간=3~10월(오전 9시~오후 6시), 11~2월(오전 9시~오후 5시). 매주 화요일 휴관.

▶관람료=25~64세:1천원, 19~24세:5백원, 65세 이상과 18세 이하는 무료.

▶안내 프로그램=하루 6~8차례 안내 프로그램 무료 운영 중. 영어.일어.중국어 등 외국어 안내도 가능. 경복궁 안내소(02-723-4283), 한국청년연합회(02-393-1355), 우리궁궐지킴이(02-723-42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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