랜딩기어 고장 일본 여객기 20초 동체착륙 드라마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11면

승객 56명과 승무원 4명이 탄 전일본공수(ANA) 여객기가 13일 오전 10시54분 랜딩기어 고장으로 앞바퀴가 내려오지 않아 일본 남서부 고치 공항에 동체 착륙했다. 사진 왼쪽부터 착륙 도중 지면과 마찰을 일으킨 비행기 앞 부분에서 불꽃이 튀는 장면, 비행기가 활주로에 멈추자 소방차들이 화재를 예방하기 위해 다량의 물을 뿌리며 긴급 안전조치를 하는 모습.[고치 AP=연합뉴스]


숨막히는 20초간의 동체 착륙 드라마였다.

승객 56명과 승무원 4명뿐 아니라 일본 열도의 전 국민이 손에 땀을 쥐었다. 13일 오전 전일본공수(ANA) 여객기 1603편이 랜딩기어 고장으로 앞바퀴가 내려오지 않아 일 남서부 고치(高知) 공항에 동체 착륙을 시도하는 장면은 오전 10시부터 NHK 등 모든 채널을 통해 생방송으로 흘러나왔다.

1603편 봄바르디에 DHC-8 터보프롭 여객기는 이날 오전 오사카(大阪) 공항을 출발해 오전 8시50분 고치 공항에 도착할 예정이었다.

그러나 착륙 태세에 들어간 순간 기장(36)은 중대한 고장을 발견했다. 뒷바퀴 두 개는 나왔지만 앞바퀴가 도무지 나오지 않는 것이었다. 8시49분 관제탑에 "앞바퀴가 안 나온다"는 연락을 보냈다. 관제탑으로부터는 "바퀴가 나왔는데 기내에서 인지하지 못한 것일 수 있으므로 일단 활주로 위를 저공비행해 봐라"는 지시가 내려왔다.

오전 9시17분 저공비행을 했지만 역시 바퀴는 나오지 않은 상태였다. 기장은 일단 상공을 선회하기로 했다. 상공 선회는 한 시간 넘게 이어졌다. 기내가 술렁이기 시작했다. 불안해하는 승객에게 기장이 기내 방송을 했다.

"여러분, 앞바퀴가 나오지 않아 선회하고 있으나 만일 동체 착륙을 하게 되더라도 평소에 훈련을 했기 때문에 문제없습니다. 안심하세요."

기내는 다시 침착을 되찾았다. 기장은 10시26분 제1차 시도를 감행했다. "뒷바퀴의 착륙 충격으로 혹시 앞바퀴가 (저절로) 나올지 모른다"는 생각을 한 것이었다. 착륙 감행. 그러나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앞바퀴가 나오지 않자 여객기는 바로 상공으로 재상승했다. 동체 착륙밖에 없었다.

상공을 선회하면서 기장은 비상착륙 시 혹시나 발생할지 모를 화재에 대비하고 기체를 가볍게 하기 위해 일단 여객기 안의 기름 대부분을 바다에 버렸다. 기내에는 다시 공포가 닥쳤다. 일부 승객은 메모지나 명함 뒤에 가족에게 남기는 글이나 기내에서 일어난 일들을 적기 시작했다. 소방차 수십 대와 구급차의 사이렌 소리가 울려퍼지고 자위대 요원들까지 긴급 출동해 침을 삼키며 활주로 옆에 대기했다. 탑승객을 마중나왔던 친척이나 친지들은 비상사태임을 뒤늦게 감지하고 공항 터미널에서 눈물을 흘리며 기도했다. 동생을 기다리던 한 여성(52)은 "제발"하며 흐느꼈다.

그러나 기장은 침착했다. 10시50분. "앞으로 연료가 10분밖에 남지 않았습니다. 동체 착륙을 시도합니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전 평소에 (이런 상황에 대비해) 많은 훈련을 했습니다. 안심하세요." 승객들은 냉정을 되찾았다. 승무원들의 지시에 따라 앞자리와 뒷자리에 몰려 앉아 두 손을 이마에 대고 낮은 자세로 구부렸다.

오전 10시54분. 1603편의 뒷바퀴가 활주로에 닿았다. 흰 연기가 올랐지만 기수는 위에 뜬 상태였다. 그리고 10여 초 후 드디어 기수가 활주로에 내려왔다.

"쿵, 쿵, 쿵". 3~4차례에 걸쳐 기수는 지면과 마찰을 일으키며 불꽃이 일었다. 아슬아슬한 순간에 긴장이 흘렀다. 그러나 수초 후 속도가 떨어진 여객기는 멈춰섰다. TV에서는 "성공입니다. 성공입니다"라는 흥분된 목소리가 반복됐다.

환호는 기내 승객들로부터도 터져나왔다. 여객기가 멈춰서자 승객들은 일제히 손뼉을 치며 환호했다. 방송을 진행하던 기자는 거의 울먹거렸다.

소방차가 달려와 여객기 동체에 물을 발사해 동체를 식히는 등 긴급 안전조치를 취했고 5분 후 승객들은 기내를 빠져나왔다. 단 한 명의 사상자도 없었다.

도쿄=김현기 특파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