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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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1면

이른 새벽에 일어난 딸아이가 갑자기 코피를 쏟는다. 너무 놀라 목 뒤를 쳐주려니 그렇지 않아도 약한 아이의 두어깨가 너무 가냘퍼 애처롭다. 요즈음 배치고사등 계속되는 시험으로 너무 무리한 것 같다. 딸아이의 과중한 학습이 어제 오늘일도 아니고, 내 아이만 겪는 일도 아닌데 난 가슴이 너무 아파왔다.
우리의 교육현실에서 내 아이를 구할 방법은 없는 것일까.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건강하게 성장하여야할 청소년기를 자신의 몸으로는 지탱키 어려울 만큼의 가방을 왼쪽어깨에, 대학입시의 압박감을 오른쪽 어깨에 매어단채 고교생활을 보내야하는 이땅의 아이들이 가여워진다.
헤르만 헤세의 시를 이야기하고 이 겨울의 문턱에서 한권쯤 읽어볼만한 책들도 많건만 아이는 별을 보고도 꿈을 꾸지못하며, 우정을 나눠야할 친구를 경쟁자로 생각하고 인간성을 상실해가는 듯하여 가슴아프다.
이렇게 내 아이를 키우고 싶지는 않은데 생각과 현실이, 일치될수없는 구조적 모순이 나를 무력하게 한다.
『우스운 얘기에도 웃지 않고 슬픈 얘기를 해도 울지 않는 모습이 비구니들을 연상케 한다』는 며칠전 어머니 모임때의 담임 선생님의 얘기가 찡하게 가슴에 다가온다. 20년이 훨씬 넘은 옛날과 지금을 비교할수 없이 세상이 달라졌다. 우리는 그때 떨어지는 낙엽중 고운 것은 책갈피에 소중하게 끼워 잘 말렸다 깊어가는 밤 그리운 친구에게 띄우는 장문의 편지속에 동봉했었다.
우리는 또 친구로부터 받은 마른 잎을 오래도록 소중히 간직했었다.
계절의 변화마저 무감각해져버린 딸아이에게 이러한 내 추억들이 아무의미가 없는 지금의 현실이 안타깝기만 하다. 악몽같은 입시지옥을 해소하고 건전한 교육풍토를 형성하기 위해서는 이제라도 교육부와 일선교육자·학부모가 함께 나서야 하리라고 생각한다.
어제와 오늘 석간과 조간을 장식한 92년도 전국 각 대학의 모집정원과 내용을 밝힌 도표를 보면서 나는 또 무거운 바위에라도 눌리고 있는 듯 가슴이 무겁고 답답하다. 앞으로 대학입시까지 40여일을 지낼 것이 까마득히 느껴진다.
해마다 되풀이되는 이 바보짓을 우리는 언제쯤이나 끝낼수 있을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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