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지영 가족 소설 - 즐거운 나의 집 [1부] 여름 ⑧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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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그림=김태헌

아빠가 내가 엄마에게로 가는 것을 하나의 배신으로 간주하고 있다는 것을 나는 안다. 그렇지 않은 거라고 내가 백번 말을 한들 소용이 없을 것이었다. 아빠는 아직도 엄마가 자신을 배신했다고 굳게 믿고 있었다. 내가 엄마에게로 가는 것은 그러니까 아빠에게는 엄마라는 단어로 표현되는 "이해할 수 없는" 부류의 인간들에 대한 통제력 상실의 상태이고 패배이며 배신이 된다는 것을 나는 알고 있었다. 대체 인간은 그냥 가고, 그냥 오는 행위에 왜 이렇게 많은 의미를 부여하고 사는 것일까.

우리는 그렇게 또 한 번의 작별을 했다. 나는 가방을 꺼내 우선 가지고 갈 짐을 쌌다.

엄마는 세월의 격랑에 난파하고 있었고 아빠는 마음속에 과거의 감옥을 세우고 어둠 속에 잠긴 자물쇠를 아직도 풀고 있지 못하고 있는 듯했다. 이제 할머니가 돌아오시면 함께 점심을 먹고 나는 B시로 떠날 것이다.

누군가 그랬다. 지명은 대지 위에 세워진 하나의 기호가 아니라 상처의 다른 이름이라고. 나는 이곳 E시에서 태어나 이곳에서 18년을 자랐다. 연수를 간 아빠를 따라 뉴질랜드에서 잠시 학교에 다니긴 했지만 내 고향이 E시라는 것을 잊은 적은 없었다. 엄마가 나를 이곳에서 낳았을 때 이곳은 서울 근교의 작은 읍이었다고 했다. 서울에 둥지를 틀지 못한 가난한 젊은이들이 살던 곳이었다고.

한때 아빠와 엄마가 유모차에 나를 태우고 산책을 하던 도시. 좌석 버스의 종점이 있던 곳. 벼가 익어가던 들판 위에 옹색한 아파트 단지들이 버려진 장독대처럼 우르르 몰려 서 있던 곳. 이제 이곳은 고층 빌딩이 빼곡한 하나의 거대한 위성도시이다. 나는 아빠와 통화하던 휴대폰을 손에 쥔 채 창밖을 내다보았다.

저 길거리에서 아빠와 유치원에 갔었다. 저 모퉁이를 돌아 아빠와 설렁탕을 먹으러 갔었고 저 버스 정류장에서 아빠가 우산을 들고 나를 기다리곤 했었다. 저 건너 상가의 2층으로 아빠와 컴퓨터를 고치러 갔었고 저 벤치에서 아빠에게 종아리를 맞고 절룩이며 울곤 했었다. E시의 대지 위로 발을 디딜 때마다 보이지는 않았지만 땅은 나를 위로 밀어주었고 그래서 나는 자라고 있었던 거다. 한때 아침에 일어나면 조금씩 바지가 짧아져 있던 시절에는 내가 이렇게 크다가 장대처럼 되어버릴까 겁이 나던 때도 있었다. 이제 나는 키가 엄마보다 크고 아빠보다 조금 작은데 작년부터인가 더 이상은 크지 않았다. 그 모든 나에 대한 기억을 언제나 내려다보던 하늘은 흐려 있었다. 비가 내릴 것 같았다. 바람도 거세어지고 있었다. 언뜻 폭풍우가 올지 모른다는 예보를 들었던 것이 떠올랐다.

엄마의 집안은 고소한 기름 냄새로 가득했다. 사람이 많았다. 날 보러 오신 외할머니 외할아버지, 두 동생 둥빈과 제제, 엄마의 선배인 서저마와 일을 보아주시는 아주머니까지. 내가 엄마의 아파트로 들어서는 순간 사람들이 모두 현관 앞으로 몰려나왔는데 내가 무슨 에베레스트라도 정복하고 돌아오기라도 한 것 같은 분위기였다. 솔직히 말하면 이 번잡스러운 대면이 좀 부담스러웠다. 외할머니는 언제나처럼 날 보자마자 또 울었다. 하지만 외할아버지와 외할머니의 따듯한 포옹을 받자, 좀 쑥스러운 기분은 여전했지만 여기가 나의 집이라는 생각이 처음으로 들기 시작했다.

"둥빈, 제제… 누나 방 꾸며 놓은 데 너희가 데려다 줘. 이제 누나는 우리와 함께 살 거야. 너희는 형제니까 이제 한 집에 살게 될 거라고."

나는 내 방으로 들어가 보았다. 방은 흰 가구들로 꾸며져 있었다. 새 가구의 나무들이 마르는 냄새가 솨 하게 났다. 괜찮았다. 엄마의 물건 고르는 솜씨는 나와 취향이 비슷하니까. 나는 베이지색 커튼을 열어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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