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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수·경칩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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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5면

24절기는 태양의 공전을 기준으로 계절의 변화를 표현한 것이다. 그러니 그 원리는 태음력이 아닌 태양력과 동일한 셈이다. 명칭은 중국 화베이 지방의 계절에 맞춰 지어졌다. 동장군이 물러날 기색이 없는 2월 초에 입춘이 오고, 아직 첫눈이 올까 말까한 12월 초순에 대설이 들어 있는 것은 그런 이유에서다.

우리 조상들은 24절기를 한반도의 계절 감각에 맞춰 농사의 지침으로 삼았다. 곡우가 되면 못자리에 쓸 볍씨를 담가 둔다거나, 망종에 모내기를 시작하고 대서에 김을 매고 하는 식이다. 실학자 정학유가 농사 스케줄을 노래로 지어 보급한 '농가월령가'는 12달 모두 첫 구절을 절기로 시작한다.

절기에 얽힌 속담이 많은 것도 그만큼 일상 생활에 밀접했기 때문이다. "처서가 지나면 모기도 입이 비뚤어진다"는 말에는 삼복 불더위를 이겨내고 가을을 맞는 서민의 여유가 들어 있다. "곡우에 가물면 땅이 석 자가 마른다" "백로에 벼 안 팬 집은 가지 마라"는 말은 절기와 농사의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를 설명해 준다. "대한이 소한 집에 놀러 갔다가 얼어 죽었다"는 속담은 해마다 일기예보 진행자나 방송 아나운서의 단골 메뉴다.

언제부턴가 절기를 입에 올리는 일이 확연히 줄었다. 그럴 수밖에 없다는 생각도 든다. 지구 온난화다 기상 이변이다 해서 수퍼컴퓨터로도 예측 못하는 기후 변화를 절기로 설명했다가 망신당하기 십상이니 말이다. 산업화로 인해 농업 인구가 절대 감소한 것도 절기를 따지지 않게 된 원인일 것이다.

며칠 전 뜻하지 않은 상황에서 절기를 인용한 말을 들었다. 뉴욕에서 북.미 관계 실무 회담을 마치고 평양으로 돌아가던 길에 일본 나리타 공항에서 만난 김계관 북한 외무성 부상에게서다. 그는 "우수가 지나고 경칩이 되고 봄이 오고 있으니 분위기가 달라질 것"이라면서 한반도 기류의 변화를 설명했다. "우수.경칩에 대동강 얼음도 녹는다"는 말을 만든 평양 시민다운 화법이 아닐 수 없다.

예부터 입을 다물고 있던 사람의 말문이 터진 것을 일러 "경칩 났다"는 표현을 썼다. 벌레가 경칩에 울기 시작하는 것에 빗대서다. 김 부상이 크리스토퍼 힐 미국 국무차관보와 만나 회담한 6일이 하필이면 경칩이었다. 제자리만 맴돌던 6자회담이 비로소 첫발을 내디뎠다. 본격적인 여정은 지금부터다. 청명(4월 5일)께가 되면 말 그대로 한반도의 기상도가 쾌청해지기를 기대한다.

예영준 도쿄 특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