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오표 실종"…양식 잃은 출판문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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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3면

언제부터인가 「정오표」를 붙이지 않은 책들이 범람하고 있다. 이 때문에 정오표가 무슨 뜻인지조차 모르는 대학생들도 적지 않게 생겨났다.
오자·탈자 하나 없이 완벽하게 만들어져 그러하다면 얼마나 바람직스러운 일이겠는가.
그러나 교과서에도 정오표를 첨부하지 않는 현실이고 보면 이유는 다른 데 있는 것 같다.
정오표를 붙일 경우 출판사의 신뢰가 떨어진다고 오판하거나, 한두 군데의 잘못이 무슨 대수냐는 무책임성 등 여러 원인이 있겠지만 출판인들의 양식이 상업주의로 병들어가고 있는 뚜렷한 증거임은 누구도 부인하지 못할 것이다.
올림픽공원 제1체육관에서 이달 초에 1주일간 열린 「91서울도서전」을 찾았다.
양적 성장을 뽐내며 화려하게 전시된 수많은 책들 가운데 대학교재 등 일부 전문서적을 제외하면 정오표가 붙은 책은 거의 눈에 띄지 않았다.
웬만한 잘못은 가볍게 봐 넘기는 요즘 독자들의 아량(?)에 편승한 출판인들의「잃어버린 양심의 전시장」이라고나 할까.
아무튼 해방이후 출간된 도서종수가 50만종을 넘어섰고 연간 발행부수가 1억3천만권을 헤아리게 돼 세계 10위권의 출판선진국으로 발돋음 했다는 주최측의 발표를 무색케 했다.
우리 선조들은 책을 간행할 때 완벽을 기하기 위해 엄청난 노력을 기울였다.
『교서관에서 책을 간행할 때 오착이 없으면 감인관에게 별도의 벼슬을 내리며, 매권 3자 이상 오착이 있을 경우 벌을 내리고, 창준(교정관), 수장(활자주조 감수관), 균자장(활자 사이에 나무 등을 끼워 흔들림을 방지하던 장인), 인출장(책을 박아내는 장인)은 모두 관직을 삭탈한다』는 법령까지 만들었을 정도다.
그 일례로 선조 6년(1573년) 3월17일 간행한 『「내훈황화집』의 인쇄가 선명하지 않고 오식이 많자 감인궁·감교관·창준·수장·균자장은 오식 한 자당 볼기 30대씌을 때리고 인출장은 권당 한 자가 선명하지 않을 경우 볼기 30대를 기본으로 한 자에 한대씩 추가토록 했었다.
이 같은 전래의 엄격이 사라진 요즘 소설·수필류의 교양도서 뿐만 아니라 학생들이 사용하는 참고서적도 오자나 잘못된 곳이 있음에도 정오표를 붙이지 않는다.
잘못된 곳을 저자나 발행처가 모를 리 없는데도 고치거나 정오표를 붙이지 않아 학생들은 틀린 대로 배우고 있다.
이 같은 부끄러운 관행이 계속되는 한 「세계 10위권의 출판선진국」이란 위치는 속 빈 강정일 수밖에 없다.
지금이라도 출판인들은 원고 교정 때부터 정확성을 기하고 출간 후 발견된 오식에 대해서는 정오표를 붙여 바로 잡아주는 전래의 미풍을 되찾아야 한다.
또한 조선시대처럼 오자가 많은 책을 법으로 규제하기가 어렵다면 독자와 서점들이 사지도 팔지도 않는 등 현실적인 제재를 가함으로써 출판인들의 양식을 눈뜨게 해야 할 것이다.
그러한 노력은 우리 책문화의 양적 발전에 질적 성장을 추가하는 기폭제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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