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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취재일기

장인정신 떠받드는 일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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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지난달 27일 일본 오사카의 교세라 돔에서 열린 '라면왕' 안도 모모후쿠(安藤百福) 닛신식품 창업자 겸 회장의 추모행사는 많은 것을 느끼게 했다. <본지 3월 2일자 3면>

올 1월 고인이 96세의 나이로 타계한 직후 오사카에서 장례를 치를 때도 1000명에 가까운 일본의 정.재계 인사들이 조문했다. 그리고 이날 닛신식품은 별도의 사내 추모행사를 마련했다. 여기에도 나카소네 야스히로(中曾根康弘), 고이즈미 준이치로(小泉純一郞) 두 전직 총리를 비롯한 6500명의 조문객이 몰렸다. 고인이 개발한 '우주 비행사를 위한 컵라면'을 들고 2005년 우주선을 탔던 노구치 소이치는 미국 휴스턴에서 영상 메시지를 보내 "우주선에서 먹은 컵라면의 맛은 잊을 수 없습니다. 다음 우주에 갈 때도 당신이 만든 컵라면을 갖고 갈 테니 먼 별에서 지켜봐 주세요"라며 고개를 숙였다.

나이 아흔을 앞둔 노구의 전직 총리나 내로라하는 정.재계 주요 인사들이 라면 한 길을 걸어온 한 기업인의 뜻을 기리기 위해 대거 모여든 것은 흔치 않은 일이다. 그러나 정말 눈길을 끈 것은 회사 추모행사 소식을 접하고 도쿄는 물론 홋카이도(北海道).규슈(九州) 등 전국 각지에서 찾아온 일반인들의 행렬이 꼬리를 물었다는 사실이다.

'컵라면'으로 상징되는 '장인 정신'을 일본 사회 전체가 얼마나 존경하고 소중히 떠받들고 있는지를 이날 행사는 상징적으로 보여 줬다. 이런 풍토는 비단 규모가 큰 기업인에게만 해당하는 이야기가 아니다.

시코쿠(四國) 가가와(香川) 현의 한 시골 동네에서 '이케가미 제면소(製麵所)'란 우동 가게를 50년간 해 온 한 할머니가 올 1월 토지소유권 문제로 가게 문을 닫게 됐다. 그러자 가가와현 주민들이 "할머니의 면을 뽑는 장인 기술만큼은 전국 어디에 내놔도 뒤지지 않는다"며 힘을 모아 새 가게를 마련해 줬다. 세계에 뽐내는 가가와현 특산 '사누키 우동'의 명성도 따지고 보면 모두 이 같은 사회 전반의 장인 우대 풍토에서 비롯한 것이다.

반도체나 각종 첨단 정보기술의 힘만이 강조되기 쉬운 시대다. 그러나 허드렛일 같고 별것 아닌 것처럼 보이는 여러 분야에서도 구석구석에 퍼져 있는 장인의 저력, 나아가 그 장인들의 정신을 떠받들고 우대할 줄 아는 사회의 힘이 일본의 경쟁력을 지탱하는 원천이라는 생각이 다시금 들었다.

김현기 도쿄 특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