벼 수매가,정치에 이용말라(사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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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해마다 벼수확기가 되면 농민단체·국회·정부는 수매가와 수매량을 둘러싸고 한바탕 홍역을 치르게 된다. 올해도 물론 예외가 아니다. 금년에 다른 점이 있다면 우루과이라운드 협상타결이 임박해 있고,쌀이 남아도는 가운데 수입농산물의 국내시장 잠식이 확산되면서 농민들의 위기감이 어느때 보다 고조돼 있다는 사실이다. 여느해 보다 큰 규모의 농민집회가 벼수매논의의 서막단계에서부터 열을 뿜고 있는 것도 이런 위기감을 반영하고 있다.
지금까지 제시된 수매가 인상폭은 정부가 5%,여당이 10%이상,야당이 16%로 돼 있다. 지난 9일 농협에서 열린 농민대표 결의대회는 일반벼 15%이상의 가격 인상안을 내놓았고,전국농민회 총연맹(전농)은 일반벼 24%인상을 주장하고 나섰다. 가격 못지않게 중요한 수매량에 있어서도 정부는 작년보다 줄어든 6백만섬 정도로 잡고 있는데 반해 전농측은 농가가 희망하는 전량을 수매하도록 요구하고 있다.
정부안과 농민측의 주장 사이에 나타나는 엄청난 거리는 한편으로 농민소득보장과 농촌경제의 안정,그리고 다른 한편으로 재정부담과 국민경제의 압박이라는 상충되는 양면을 조화시키는 것이 지난한 일임을 말해준다.
여기서 우리가 당부하고자 하는 것은 벼수매와 관련된 제반 고려사항과 농민들의 입장이 우선 이 문제의 전담기구인 양곡유통위원회의 검토과정에서 충분히 걸러진 다음 국회의 성실한 심의를 거쳐 가급적 후유증을 적게 남기는 결말이 나오도록 해야 한다는 점이다.
특히 이번의 경우 내년에 있을 일련의 선거를 의식한 정치권이 균형감각을 상실한채 이 문제에 접근하는 일이 없기를 당부해 둔다. 이미 농촌출신 의원들의 개별적·집단적 당내 로비활동이 나타나고 있고,여기에다 지방자치단체의회의 목소리까지 가세해 자칫하면 합리적인 해결책 모색에 필요한 냉철함을 잃게 되지나 않을까 심히 우려된다.
우리는 또한 농민이 겪고 있는 고통의 크기를 십분 이해하면서도 벼수매에 관한 농민의 입장을 밝히고 주장하는 여러가지 방법중 가급적이면 기왕에 농민대표가 참여하고 있는 양곡 유통위와 국회를 좀더 많이 활용해줄 것을 권고하고 싶다.
이미 4조원을 넘어선 양곡관리기금의 적자문제가 없더라도 농산물가격 지대정책을 더이상 존속시킬 수 없는 대외통상환경이 머지않아 밀려 닥칠 것이 예상되는 만큼 이에 대처할 수 있는 근본적인 농민소득증대책이 서둘러 강구돼야 할 것이다.
그것이 어려우면 정부는 농민의 요구를 다 반영할 수 없는 사정을 설명하는 일이라도 좀더 열심히 해야 한다. 전국으로 번지는 농민들의 시위와 결의대회의 격렬함에 비해 농정당국의 자세는 너무 안이하다는 인상을 주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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