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기경 승용차(분수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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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흔히들 승용차를 사회적 신분의 대표적 상징으로 받아들인다. 후진국은 말할 것도 없고 승용차가 생활필수품화한 구미 선진국에서 조차도 그렇다. 그래서 부와 지위·권력에 비례하는 승용차의 고급화를 아직은 온 세계의 자동차문화가 별 저항없이 하나의 불문률로 여긴다.
우리나라도 예외가 아니다. 호화저책과 고급 승용차가 상징해주는 「계급성」의 위력이 대단하다. 졸부들의 황금만능주의까지 가세해 무례할 정도의 승용차 고급화 추세가 날로 확대되는 경향이다. 이처럼 비뚤어져가고 있는 우리 자동차문화에 하나의 교훈이 될만한 사례가 생겼다.
김수환 추기경­. 성속간에 널리 알려진 거물이다. 한국천주교 최고위 성직자일 뿐만 아니라 세속의 반독재투쟁과 민주화운동·인권문제 등에 기여한 그의 족적을 아무도 부인할 사람은 없다. 천주교라는 막강한 종교세력의 수장이며 추기경이라는 명예,세속의 존경,인물의 크기 등에 비추어 그의 승용차는 최고급이라도 손색이 없을 만하다.
그러나 그의 승용차는 국산 중형차 스텔라였다. 최근 차가 낡아 바꾸었는데도 스텔라가 단종돼 옛차종에 가까운 쏘나타를 택했다고 한다. 그가 승용차 차종을 로열살롱에서 스텔라로 낮춘 것은 86년말이었다.
천주교주 교회의가 성직자의 겸양을 몸소 실천하고 가난한 사람들과의 연대를 보다 공고히 다지기 위한 방안의 하나로 「승용차 낮추기」를 결의하자 그는 솔선수범해 자신의 승용차를 낮췄다. 주교들의 승용차 낮추기는 탄광·농촌·근로현장을 직접 찾아 며칠씩 함께 지내고 온 「현장체험」에 대한 깊은 반성에서 비롯됐었다. 얼마전 서울의 한 종합대학총장이 대학재정을 절약하기 위해 소형 엑셀승용차를 손수 운전하고 있다는 기사도 보도됐다. 특수한 사명을 갖는 성직자나 대학총장의 인격을 단순히 승용차 한대로 평가할 수는 없다. 그렇지만 추기경이나 대학총장보다도 더큰 고급승용차를 타는 사람들은 자신들이 승용차에 걸맞게 그들보다도 과연 사회에 더 많은 공헌을 해야겠다는 생각이라도 해보는지.<이은윤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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