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보」 증언 왜 봉쇄하는가(사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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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비교적 순탄하게 진행되던 국회의 국정감사가 정태수 전한보회장등의 증인채택을 둘러싸고 전면 중단된 것은 이유여하를 막론하고 유감스런 일이 아닐 수 없다.
우리는 이번 사태를 의회주의를 운영하면서 흔히 있어왔던 여야대결의 한 해프닝 정도로 보아서는 안된다고 믿는다.
비록 그 배후에 국정감사의 실적미비를 만회하고 수서비리를 차기 총선전략에 연계시키려는 야당의 숨겨진 의도가 있었다 치더라도 증인채택을 무조건 봉쇄한 여당의 태도가 기계적으로 상쇄되어 평가되는 것은 온당치 않다고 보기 때문이다.
알다시피 한보의 수서특혜 비리사건은 사법당국의 소추에도 불구하고 그 배후와 진상이 밝혀졌다고 보기 어려운 6공의 대표적 정치사건이다.
구체적 법리를 떠나 국민의 보편적인 법감정은 사건이 일단락 되지도 않은 상태에서 은행들이 계속 변칙적인 지원을 하고 한보가 기업력을 유지하는 것은 보이지 않는 손의 비호가 있기 때문이 아니냐는 의혹을 풀지 못하고 있다.
또 정회장이 입을 꼭 다물고 있고 사법당국·은행 등이 비교적 관대하다는 인상을 줌으로써 감춰진 진상에 대한 갈증은 어떤 유사한 사건보다 높은게 사실이다.
이런 상태에서 야당이 정회장을 불러 증언을 듣자고 주장하는 것은 당연한 민의 대변이며 이를 여당이 무조건 원천봉쇄하는 것은 오히려 의혹을 가중시킬뿐 아니라 국회가 스스로 권능을 제한한다는 비난을 면키 어렵다.
압도적 다수를 차지하고 있는 거여가 이런 식으로 국정을 처리한다면 국민들은 의회를 통한 갈등의 해소에 아예 체념할 수 밖에 없다. 더구나 민자당은 지금의 거여가 국민의 직접선택에 의해 구성된 것이 아님을 겸허하게 반성해 볼 필요가 있다.
민자당의 설명인즉 수사중이거나 재판에 계류중인 사건의 관계자는 법률상 증인으로 내세울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민주당의 주장에 의하면 기결수란 입장의 차이가 있긴 하지만 김근태·김철호·전경환씨는 국회증언에 응한 적이 있다. 민자당이 꼭 국민의 궁금증을 풀어줄 성의가 있다면 정회장도 참고인 등으로 법률적 요건을 갖춰 국회에 부를 수 있으리라 본다.
이런 점은 처음부터 무시하고 야당의 요구를 순전히 정치게임의 차원에서 묵살하고 있는 민자당의 태도를 오만과 은폐의 저의가 있는 것이라고 주장한다고 해서 지나친 말일까.
증인채택이 여러가지 사정상 곤란하다면 지금이라도 국회는 국정조사권 발동 문제를 진지하게 검토해 볼 것을 권하고 싶다. 그런 의미에서 야당도 정부측의 수감태도가 오만하다는 등 국감 거부의 논점을 분산시킬 것이 아니라 한보에 대한 국정조사권 하나만이라도 붙들고 거여의 횡포에 맞서 국민지지를 구하는 대응을 하는 것이 현명하리라 본다. 그렇지 않고 국감중단이 통합야당의 체면치레란 인상을 준다면 국민을 실망시키긴 여당이나 마찬가지가 되고 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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