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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느낀 조국의 체온(촛불)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17면

『아주머니 힘내세요. 돌아가신 분을 생각해서라도 쓰러지시면 안돼요.』
『많은 분들의 정성에 새 힘이 솟습니다. 고국이 고마울뿐입니다.』
13일 오후 9시쯤 서울 남대문로 5가 무허가하숙집 5층골방.
육군소령 계급장을 단 군인 한명이 고국에 돈벌러 왔다 숨진 중국교포 윤일만씨(49)의 부인 최영순씨(45)의 억센 손을 잡고 위로의 말을 건네고 있었다.
남편의 사망소식에 골방에서 식음을 전폐하고 누워있기만 했던 최씨도 줄을 잇는 정성에 차츰 예전의 활기를 되찾아가는 듯했다.
이름 밝히기를 거부하는 이 군인은 『퇴근하다 신문을 보고 호주머니를 털어 이렇게 딱한 이웃도 있나 싶어 물어물어 찾아왔습니다』며 10만원이 든 봉투를 선뜻 내놓았다.
제주에서 건축자재가게를 운영하는 문찬식씨(43)는 1백만원을 보내려 했으나 추석대목이라 수금이 잘 안되었다며 하루 수금한 돈 50만원을 몽땅 보내왔다.
『하룻밤새 수백만원대의 술자리가 허다한 판에 돈벌러 고국에 함께 온 부부가 이승과 저승으로 갈라선 최씨부부의 이야기를 듣고 한국인이라는 사실이 부끄러웠습니다. 장례비에라도 보태고 싶습니다.』
문씨는 과소비가 문제된 우리사회에 이런 이웃이 있다는 것은 전통적인 인정이 사라져가는 것이라며 안타까워했다.
이밖에도 유치원생·회사원·익명의 서울시민등 각계의 온정이 1백47만원.
그 돈은 비록 큰 돈은 아니지만 실의에 빠진 최씨에게 삶의 의욕을 불러일으킨 값진 돈이었다.
『남편뒤를 따라 죽고만 싶었는데 고국의 여러분들이 보내주신 정성을 접하고 고향의 칠순노모·어린자식들과 함께 살아갈 용기를 다시 얻었습니다.』
최씨는 서울시와 협의를 거쳐 남편의 장례도 치를 수 있게 됐다.
『동사무소 직원이 장례문제로 몇번 다녀갔습니다. 비록 비명에 간 남편이지만 이제는 편히 눈감을 수 있을 것입니다.』
동양최대의 명절인 추석을 앞둔 최씨는 더이상 슬프지만은 않다. 만주벌 찬바람처럼 썰렁하게만 느껴지던 조국의 품이 한없이 따뜻하게 느껴졌기 때문이다.<김상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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