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현궁의 가을(분수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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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영의정 김좌근,행도승지 민치상,기사관 박해철·김병익은 대왕대비의 교서를 받들고 관현에 있는 흥선대원군의 집에 이르렀다.
익성군(고종)은 대청에서 내려와 허리를 굽혀 교서를 맞이하면서 남쪽을 향해 섰다. 치상이 이름과 나이를 물은 다음 교서를 상위에 놓으니 익성군이 상앞에 나아가 무릎을 꿇음에 치상이 교서를 받들어 읽고 또 말로 아뢰었다. …잠시후 익성군은 복건에 옥색도포를 입고 흰사폐에 검은 가죽신 차림으로 가마에 올라 돈화문밖에 이르니 백관이 옥색옷 차림으로 줄지어 서 있었다.』
조선왕조 『고종실록』 철종 14년(1863년) 12월 8일조 기록은 열두살난 흥선군의 둘째아들 명복소년이 구름재(운현)의 잠저에서 왕조의 제26대 임금인 고종으로 추대되는 장면을 이렇게 기술하고 있다.
서울 종로구 운니동 114의 10번지. 세칭 운현궁으로 알려진 이곳은 고종의 출생지이지만 그 보다도 대원군의 자취와 함께 구한말의 풍운을 간직한 역사의 산실로 더 유명하다.
흥선군은 조대비의 명을 받아 여기서 대원군의 위의를 갖추고 대신들의 문안을 받았음은 물론 대소관헌들의 소관사항을 일일이 보고받으며 임금을 대신해 국정을 요리했던 것이다.
그때까지 이름도 없었던 이 사저는 「구름재」를 따서 「운현궁」이라 불리게 되었고,집의 규모도 차츰 커져 마치 대궐같은 위엄을 갖추게 되었다.
당시 운현궁에는 창덕궁과 가깝게 왕래할 수 있는 임금전용의 경근문,대원군 전용의 공관문이 있었다. 그리고 담장안에는 집무실로 쓰던 사랑채의 노안당,고종이 태어난 안채 노락당,별당인 이로당 등 고래등 같은 석채의 건물을 두었는데,이 건물들은 퇴락한 채 아직도 보존돼 있다.
운현궁은 왕조말기 온나라를 호령하던 임금의 아버지로서,또 난초와 글씨에 뛰어났던 한 선비로서 대원군의 위엄과 예술적 감각이 구석구석에 배어있는 조선시대의 빼어난 건물이라는데 이의를 제기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이제는 대원군 후손의 개인소유로 된 이 운현궁을 매입,새로 단장하려던 서울시의 계획이 엊그제 시의회의 부결로 좌절되고 말았다.
자칫 잘못하면 이곳에 또 거대한 빌딩이 들어설지도 모른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운현궁의 가을은 짙어만 가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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