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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바둑 대부 조남철 9단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26면

한국바둑의 영원한 대부 조남철 한국기원 명예이사장.
「입신」의 조9단이 지난해 입단반세기를 맞았고 내년이면 고희에 든다.
지난 3일 「한일대학생 바둑교류전」이 열린 서울리베라호텔 별관 8층홀 주위를 조옹은 슬슬 걸어다니고 있었다. 「손주」들이 두는 바둑판도 슬쩍 보다 창밖도 내다보고 담배도 피워무는 품이 해거름 마실 나온 시골어른 같았다.
조옹의 여유로운 몸가짐에는 도통한 사람만이 맛보는 내밀한 즐거움이 배있었다.
『요즘 뭘 하는게 있어야 인터뷰를 하지. 허허.
1남2녀 출가시키고 역삼동이란데서 내자(최충순·65)하고 단촐하게 살고 있소.』
-바둑계에는 자주 나가십니까.
『얼굴 내미는 거지 뭐. 허허. 이런저런 대회에서 축사다, 시상이다해서 와달라면 슬슬 가보지요.
바둑계도 이만하면 커졌다 싶고 후배들 얼굴보면 기분좋고 그렇소.』
-오늘 대회에선 무슨 말로 한 수 가르쳤습니까.
『지는 바둑을 두라고했소. 무슨 소리인고 하니 이기려는 욕심만 앞세우다간 대세판단을 그르치기 십상이란 뜻이지.
한판의 바둑은 생노병사·흥망성쇠의 드라마같소. 그러니 바둑을 두다보면 감정이 안나려야 안날 수가 없게 돼있어.
그러나 감정이 동요되면 판단력이 흐려져. 작은 것에는 기분좋게 져줄 때 큰 것을 얻을 수 있습니다. 세상 이치지. 허허허.』
조9단은 툭툭 던지듯이 말을 하고는 예외없이 허허 웃었다.
해방직후 20대의 약관으로 한국바둑계를 일궈 씨를 뿌렸고 그후 스스로 20여년간 최고수로 일세를 풍미했던 조9단이다.
이제 물경 6백만팬의 바둑강국이 된 지금 조옹의 웃음은 외로웠던 개척의 고단함을 훌훌 털어낸뒤 두팔 휘둘러 거칠 것 없는 노인의 넉넉함으로 다가왔다.
-편찮으시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몸조리는 어떻게 하시는지요.
『한 3년째 기가 허해졌어요. 뱃속이 바람이 꽉 찬 것처럼 돼가지고는 여기저기 욱신거리고 뭔가가 치밀어 오르는데 의사들도 왜 그런지 모르겠다고 하니. 거참.
내가 젊었을 땐 유난히 기가 세어 몸을 좀 무리했지. 술도 많이 마셨고. 골병든 것 같아. 허허.
그러나 어쩌겠소. 늘그막에 생사란 누가 어떻게 한다고 정해지는 것도 아니고 그저 기분을 명랑하게 갖고 그것을 즐기면 최고 아니오.』
조옹은 그의 말대로 특별한 투병생활을 하지 않는 듯했다.
술은 끊었지만 의사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담배는 여전히 즐긴다. 1시간쯤의 인터뷰동안 그는 네개비의 담배를 피웠다.
다만 젊은 시절부터 계속해온 유일한 취미인 참선을 하기위해 요양겸 산사를 가끔 찾는다고 했다.
전번엔 계룡산 신원사와 양평의 암자를 다녀왔고, 지난주에는 지리산 화엄사에서 머무르다 상경했다.
『바둑이란게 싸움인데 말이야 그 수가 경지에 들어서면 「싸우지 말라」 「집착하지 말라」는 부처의 가르침을 따라야 돼. 그래야 이기거든. 도의 이치란 그런거요.』
-그런데 젊은 프로기사중에 몇사람은 그런 이치를 모르는지 너무 독선적이라는 비판도 있습니다.
『어쨌든 바둑은 철저한 승부세계인데다 개인이 플레이를 해야 하니 기사들의 성격이 한쪽으로만 흐르기 쉽거든.
대국이 끝나면 보통의 자세로 돌아와야지요.
그런 점에서 기사들이 바둑판을 메고 대중속으로 들어가 팬서비스를 많이 하는 것도 도리중의 하나요.
운동장이나 체육관같은 곳을 빌려가지고 프로기사들과 팬들이 바둑판을 놓고 북적거리면 얼마나 보기 좋겠소.』
-숱한 바둑에 관한 기억중 가장 보람을 느끼신 것은 어떤 것입니까.
『역시 한국기원이 지금의 관철동 집을 마련했을 때지요. 내가 해방되던 해 남산밑 적산가옥에 한성기원이란 간판을 단 이래 통의동으로, 인사동으로, 명동으로 16번이나 간판을 메고 이사를 다녔어요.
그런데 이후락씨 있잖소. 그 사람이 청와대비서실장 할때 몇번 바둑지도를 해줬지. 그 연줄로 지금의 사옥이 마련됐지요.
68년8월 「사단법인 한국기원」이란 번듯한 간판을 5층 건물에 거니 만감이 교차합디다.
그땐 5층을 세도 놓고 좋았는데 요새는 좁아서 큰 일이오. 큰 대회는 치를 수 없어 보다시피 호텔을 빌려 하는데말이 아니지요. 그래 땅을 물색하러 다니는데 비싸서 도무지…. 거 땅 좀 구해줘. 허허.』
-요즘도 바둑은 자주 두십니까.
『알다시피 3년전부터 신문기전등에는 못나가잖소. 은퇴한 셈이지.
대신 나하고 바둑 좀 두자는 사람도 간간이 있어 가능한한 둬줍니다.』
이 대목에서 조옹은 잠시 말을 끊었다. 그러고는 눈을 빛내며 말했다.
『건강이 회복되는대로 다시 공식대회에 출전하겠소.』
조9단은 60세가 넘어서도 왕성하게 기전에 참여했었다. 그러나 워낙 재주가 신통한 후배들이 많아 성적이 좋은 편은 아니었다.
이제 다시 출전한다 해도 좋은 성적을 기대할 수는 없으나 힘이 닿는한 반면을 자주 대해야하는게 기사의 의무라고 했다.
-앞으로 하시고픈 계획은 무엇입니까.
『한국바둑사를 정리해서 책으로 내는걸 필생의 사업으로 생각하고 있어요.
젊은 시절부터 자료는 그런대로 모아놨지요.
현대식 한국바둑의 역사가 50년이나 지났는데 반드시 정리를 해야합니다.
이런데 몸도 시원찮고 재주도 없으니 안타까운 일이지. 허허허』
이날 기자는 조남철선생을 찾아가면서 선생에게는 죄송하지만 이런 말을 떠올렸다.
『조남철이가 와도 안된다.』
중급자 정도가 바둑을 두면서 틀림없이 이겼다고 장담할때 쓰는 말이다.
어느 분야에나 그 분야를 대표할 수 있는 사람이 있다. 그러나 조9단만큼 확고하게 대명사처럼 된 사람은 많지 않다. 김인 9단은 「김국수」로, 조무현9단은 「조옥위」로, 서봉수9단은 「서명인」으로 본인이 애정을 갖거나 팬들이 기억하는 타이틀 이름을 따서 불리기도 한다. 그러나 조9단은 그 훨씬 위에 있다. 「조남철선생님」이다.
그는 도인이다. <이헌익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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