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2007 희망찾기] 나를 일으킨 건 팔할이 사랑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월간중앙
인천에서 두부와 각종 부식을 트럭에 싣고 다니며 파는 김충근(46) 씨. 어린 시절 입양 사실을 알고 긴 세월 방황하다 노름에 빠져 재산을 탕진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는 지난해 막내를 입양하고 ‘저축의 날’에는 상까지 받았다.


30 년 전, 한 소년이 아버지의 산소를 찾았다. 두 손에는 맥주캔과 농약병을 쥔 채였다. 산소 옆에 주저앉아 한나절 동안 목을 놓아 울다 죽으려고 농약병을 땄다.

▶인천 연수동과 청학동 일대를 돌며 두부와 부식을 파는 김충근 씨.

사는 것이 괴로워서가 아니라 세상이 미워서였다. 자신을 아끼는 모든 사람의 가슴에 못을 박고 싶은 모진 심정이었다. 당신들이 나를 죽게 한 것이라고 비난하고 싶었다.

중학교 2학년 때까지 김충근(46) 씨의 삶은 평온했다. 비교적 넉넉한 집안에서 큰 걱정거리 없이 지내던 그에게 불행은 갑자기 들이닥쳤다. 세상이 다 무너져도 자신의 편이 되어줄 것 같던 든든한 사람, 아버지. 그 아버지가 병으로 돌아가신 것이다.

소년은 3일장을 치르는 내내 아버지 시신 곁에서 떠나지 못했다. 쏟아지는 눈물이 그치면 아버지의 눈을 뜨게 하려고 애를 쓰고 싸늘하게 식은 얼굴을 향해 말을 걸었다.

아버지의 죽음 이후 겨우 슬픔을 추스르던 와중에 어머니가 재혼했다. 몇 년 후 고등학생이 되었을 때 어머니로부터 청천벽력 같은 말을 듣게 됐다. 자신이 친아들이 아닌 양자로 들어온 자식이라는 것이었다.

위태롭게 버티고 있던 자신의 인생이 와르르 무너지는 기분이었다. 자신의 친부모도, 양부모도 모두 미웠다. 세상에 대한 증오로 가득 차 그는 자살을 결심했다. 양부모나 친부모 모두 아들을 죽음으로 내몰았다고 비난받게 하고 싶었던 이유 없는 반항의 발로였다.

살아생전 그토록 아들을 아끼고 사랑했던 아버지의 영혼이 그를 돌봐준 덕분이었을까? 다행히 그는 죽음을 선택하지는 않았다.

도박과 경마에 빠졌던 젊은 시절

아직은 때가 아니라는 생각에 김씨는 농약병을 버렸지만, 절망과 증오는 여전히 가슴에 남아 있었다. 학교를 자퇴하고 가출해 무작정 친구가 있는 부산으로 향했다.

“당시 부산 범일동에 있던 고속버스터미널에서 구두닦이며 신문팔이며 닥치는 대로 일했습니다. 버스 안을 돌아다니며 ‘조간이 왔어요~ 신문이 왔어요~’라고 소리치며 다녔죠.”

20대 초반, 오직 재미만 쫓으며 살던 청춘이었다. 4년간의 부산생활을 접고 고향인 나주로 돌아왔지만 이번에는 유혹에 약한 그의 마음을 도박이 흔들어 놓았다. 어머니와 양계사업을 하던 중이었다. 시골에서는 구경도 못하던 귀한 포터 트럭을 몰래 팔아 220만 원을 손에 쥐었다. 1주일 동안 도박하고 실컷 놀고 나니 그새 돈이 바닥나 있더란다.

“한번 뭔가에 빠지면 손을 털고 일어날 때까지 ‘올인’ 하는 체질이라…. 돈이 바닥난 뒤에는 게임장에서 푸닥거리하는 일을 해 주고 몇십만 원을 받았는데 가게 주인이 게임기 돌아가는 모양을 보여주더군요. 돈을 못 따게 교묘하게 다 조작해 놓더라고. 뒤통수를 맞은 기분이었죠.”

돈이 바닥나고 수중에는 5,000원짜리 한 장밖에 없었다. 도저히 집으로는 돌아갈 수 없어 무작정 서울행 버스를 잡아탔다. 서울에 도착하니 주머니 속에는 전철비와 전화비만 남아 있었다. 서울 살던 친구와 어찌어찌 연락이 닿아 그 집에서 신세를 지게 됐다.

이후 김씨는 건설자재회사에 기사로 취직했고 자리도 잡아가는 듯 보였다. 여름이면 찜통이 되고 겨울이면 얼음장이 되는 건설자재회사의 컨테이너 박스에서 먹고 자는 생활이었지만 돈 모으는 재미에 견딜 만했다. 3년을 그렇게 사니 월세를 살 만한 돈이 모였다. 2년 후에는 전세금이 되어 그럭저럭 목돈을 만질 수 있었다.

그러나 우연히 친구들과 함께 구경이나 해 보자며 찾아간 경마장이 또 다른 화근이 될 줄이야…. 친구가 1만 원을 걸고 6만 원을 받는 것을 보고 눈이 확 뒤집혔다. 경마를 시작한 지 얼마 안 된 어느 날 6만 원을 넣었는데 210만 원이 나왔다.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경마가 열리는 사흘은 아주 그곳에 눌어붙어 살았다.

한번 시작하면 끝장을 보지 않고서는 못 배기는 성격과 젊은 혈기에 그는 전 재산을 경마에 털어넣기 시작했다. 결국 딱 3개월 만에 7년간 고생해 모은 전 재산을 날렸다.

“빈털터리가 됐을 때 지금의 아내를 만났습니다. 첫눈에 반해 바로 결혼을 결심했죠.”

결혼 후의 삶도 고통의 연속이었다. 험한 일을 오래 한 탓에 허리 디스크가 찾아와 하던 일을 그만둘 수밖에 없었다. 택시기사로 나서기는 했지만 먹고살기에도 버거울 정도의 벌이에 그쳤다.

“그때 마누라가 고생을 많이 했죠.”

김씨의 목소리에서는 지난날의 회한과 미안함이 묻어난다.

그나마 살림이 피기 시작한 것은 12년 전 두부장사를 시작한 덕분이었다. 친구가 소개해 준 이 일은 다행히 처음부터 순조로웠다. 다만 김씨를 괴롭힌 것은 아버지의 직업을 아이들이 창피해 하지 않을까 하는 걱정이었다. 트럭에 두부를 싣고 종을 치며 이 동네, 저 동네 돌아다니다 자식의 친구가 보고 놀릴까 염려스러웠다고.

“어떤 아주머니는 두부장사를 하는데 자기 자식이 매일 친구들로부터 ‘너희 엄마 딸랑이지’ 하고 놀리는 통에 청소부로 취직했다고 하시더군요.”

자식 생각에 두부장사는 5년만 하고 그만두겠다고 결심했지만 또다시 닥쳐온 시련 때문에 그것도 계획대로 되지 않았다. 한창 내집마련의 꿈에 부풀어 있던 1999년, 김씨는 주식에 투자했다 다시 전 재산을 날렸다. 몇천만 원을 동원해 산 주식이 나흘 만에 반토막나 버렸기 때문이었다. 결국 입주할 날만 기다리던 시흥의 아파트는 한 번 살아보지도 못한 채 남의 손에 팔렸다.

“차를 타고 완공도 안 된 아파트를 돌아보며 가족과 함께 웃고는 했는데…. 지금은 그 아파트가 당시 가격의 세 배로 뛰었더라고요.”

그의 손에 남은 것은 아파트를 팔고 남은 500만 원. 그나마 중개료와 은행 대출이자로 다 사라지고 또다시 빈손이 됐다. 40년 남짓 살면서 전 재산을 잃어버리기를 몇 차례나 반복한 셈이었다. 도대체 몇 번을 더 절망하고 무너져야 하는지 하늘을 원망하며 포기하고 좌절할 법도 했다.

그러나 김씨는 30년 전과는 달랐다. 그에게는 지켜야 할 소중한 가족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동안의 시련을 이겨낼 수 있었던 것이 부모님의 사랑과 부인의 사랑 덕분이었다면, 이번에는 가족을 향한 자신의 사랑의 힘을 믿었다. 그 힘을 짜내 다시 한번 희망을 붙잡기 위해 발버둥쳤다.

▶동네 가득 울려 퍼지는 종소리에 저녁 찬거리를 사려는 손님들의 발걸음이 바빠진다.

주식 투자에 실패…맨손으로 다시 일어서다

먼저 은행빚을 갚기 위해 허리띠를 졸라맸다. 이발비가 아까워 머리도 깎지 않았다. 심지어 집에서는 소변 본 물을 내릴 때는 손 씻은 물을 모았다 내릴 정도였다. 일회용 면도기 두 개로 1년을 버텼다. 일 끝나고 즐기던 생맥주나 각종 간식도 끊고 악착같이 돈을 모으기를 2년째. 드디어 모든 은행빚을 청산할 수 있었다.

아끼는 것이 이제는 습관이 되었다는 김충근 씨. 유별난 짠돌이 아빠로 방송에 소개된 이력이 있을 정도다. 자린고비의 공적을 나라도 인정해 준 것일까? 신협 통장에 오랫동안 적금을 부어온 그는 지난해 10월 ‘저축의 날’ 행사에서 국민포장을 받는 영광을 안았다.

12년 전부터 계속해 온 두부장수 일도 이제는 완전히 기반을 잡았다. 골목 초입부터 그의 종소리가 울려 퍼지면 오래된 단골들이 장바구니를 들고 뛰어나온다. 트럭에 각종 부식과 따끈따끈한 두부를 싣고 매일 인천 청학동과 연수동 일대를 누빈다. 힘들었을 옛 이야기를 하면서도 여유 있는 웃음을 띠는 이 사람, 지금은 행복하단다.

“주식만 안 만졌어도 훨씬 괜찮게 살았겠지만, 지금의 삶도 좋아요. 아직 전세 아파트에 살고 있어 이사를 자주 하지만 동네마다 가서 좋은 사람들 사귀는 것도 사는 낙이네요.”

김씨의 재기가 누구보다 아름다운 이유는 따로 있다. 지난해 2월, 김씨 가족은 막내 승민이를 입양했다. 고등학교 1학년 때 처음 자신의 입양 사실을 알고 나서 그는 보육원을 열고 싶다는 생각을 했었다. 자신의 뿌리도, 근원도 모르는 아이들이 그 ‘모름’으로 인해 고통받지 않고 자유롭게 살 수 있도록 해 주고 싶었다.

그러나 자유로움보다 부모의 사랑이 더 소중하다는 것을 안 김씨는 입양을 통해 그때의 생각을 실천하고 있다. 이제 아이를 4명이나 품게 된 김씨는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아빠’를 자청한다.

“아이 셋을 키우면서 관절염으로 고생한 아내가 먼저 입양 이야기를 꺼낼 때는 깜짝 놀랐어요.”

막내 이야기가 나오자 그의 눈이 빛나고 입가에는 흐뭇한 미소가 걸린다. 승민이는 여러모로 김씨 부부에게 특별한 아이다. 부부가 입양 신청서를 접수한 날이 마침 승민이가 태어난 날이었던 것. 신청 후 20일 만에 만난 승민이는 무슨 인연인지 김씨 부부의 첫째아이와 꼭 빼닮은 얼굴을 하고 있었단다.

처음에는 승민이가 눈도 안 마주치면서 아빠 속을 썩이기에 김씨는 자신의 사랑이 부족한가 보다 하고 자책도 했다. 1주일 되던 날 드디어 승민이는 아빠와 눈을 마주치고는 방긋 웃었다. 김씨는 그 순간 또 한 아이의 아버지가 되었음을 실감했다고 고백한다.

아이가 자신의 어린 시절처럼 고민하고 방황할 것만 같아 적지 않게 고민했던 것도 사실이다. 그래도 그는 사랑의 힘을 다시 한번 믿어보려고 한다. 양어머니의 속을 무진 썩였던 자신이 중년이 돼서야 그 사랑의 깊이를 알게 된 것처럼 승민이도 언젠가 자신의 마음을 알아줄 것이라고 확신한 것이다.

아이를 입양한 후 김씨는 어머니에게 전화 한 통을 걸었다.

“어머니, 나 애 하나 입양했소.”

“네가 뭣이 부족해 입양을 했다냐?”

“어머니 마음 알고 싶어서 그랬지.”

“….”

“엄마, 사랑해요.”

“썩을 놈!”

30대까지도 김씨는 어머니에게 자기가 받은 것을 갚는 것뿐이라는 일종의 의무감을 지울 수 없었다. 입양됐다는 사실로 마음에 입은 상처가 너무 깊었던 것이다. 막내 승민이는 그 해맑은 웃음으로 아빠 가슴의 생채기에 딱지를 내려앉혔다.

김씨는 한국입양홍보회 ‘엠펙(www.mpak.co.kr)’ 회원으로 활발히 활동 중이다. 입양 가족의 고민과 기쁨을 많은 사람과 나누고 싶어 김씨와 그의 아내는 승민이와 보내는 시간을 엠펙 사이트에 꼬박꼬박 일기로 남기고 있다. 아이가 쑥쑥 자라는 모습을 한순간도 놓치지 않으려는 듯 페이지마다 사진이 가득하다.

“차라리 시설 좋은 보육원에서 자라면 잘 입고 잘 먹고 잘 배우면서 자라는데 왜 사서 고생을 해?”
직접 대놓고 말은 안 했지만 들려오는 말은 모두 부정적이었다. 그렇다. 우리집에 오면 잘 먹이고 잘 입히고 충분히 교육할 자신은 없다. 그러나… 그러나 나는 난 열심히 일할 것이다. 비록 다른 아이 옷을 물려 입힐지라도 너를 위해 최선을 다할 것이다.
“네가 외로울 때 옆에 있어 주고, 네가 배고플 때 같이 나눠 먹고, 네가 슬플 때 우리는 모두 함께 울어 줄게!”
(김충근 씨의 일기 중에서)

김씨와 아내의 승민이에 대한 뜨거운 사랑 고백에 많은 입양 가족이 공감의 댓글을 남기고 있다.

입양이 가장 아름다운 베풂

입양 활동은 홍보가 잘돼야 하는데 비용이 없는 탓에 김씨가 팔을 걷어붙이고 나섰다. 각종 TV 프로그램에 출연했고 언론 인터뷰도 마다하지 않는다.

이번 인터뷰 섭외를 위해 전화를 걸었을 때 “저한테 들을 이야기가 별로 없으실 텐데…” 하면서도 선선히 승낙했던 것에는 그 나름의 ‘꿍꿍이셈’이 있었다. 입양한 자신의 이야기가 한 명의 아이라도 더 입양할 수 있도록 해 준다면 더 바랄 것이 없겠다는 심정이었다. 그러나 그의 이런 활동을 못마땅하게 여기는 사람도 있다고 한다.

“며칠 전, 가깝게 지내는 교인이 제가 자주 언론에 등장하는 것을 두고 이런 말씀을 하시더군요.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고요. 주변에 입양한 사람이 있는 것 자체가 부담스러운가 봐요. 우리나라 사람들에게는 아직 입양이라는 문화가 익숙하지 않은 탓이겠지요.”

김씨는 어려움을 극복하면서 아끼는 버릇만 생긴 것이 아니다. 남에게 베푸는 것 역시 그의 고질적 습관이 되어버린 터였다. 그는 지금 10년째 불우이웃돕기 성금을 모아 내고 있다. 일상의 아주 작은 것이 그에게는 남을 돕는 계기가 됐다.

두부장사를 시작하면서 자연히 라디오를 듣는 시간이 많아졌는데 <지금은 라디오 시대>라는 프로그램의 ‘사랑의 손길을 기다립니다’ 코너를 듣다 보니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단다. 아내와 상의한 끝에 매일 도시락을 싸 가지고 다니면서 아낀 밥값을 기부하기로 결정했다.

남을 돕는 마음을 아이에게도 가르치고 싶어 첫째아이에게 용돈의 10분의 1은 십일조로 헌금하고 나머지 중에서 또 1은 남을 돕는 데 쓰라고 했다. 그런데 아버지를 꼭 빼닮은 첫째는 군것질하고 십일조 하고 남은 돈 전부를 구걸하는 사람에게 줘버렸다고 한다. 남을 도왔다는데 할 말이 없어진 김씨는 허허 웃으며 “남은 한 달 동안 네가 좀 힘들겠구나” 하고 말았단다.

▶김충근 씨가 따끈따끈한 두부를 손님에게 건네고 있다.

그래도 우리 가족 중에서는 아내가 제일 남을 돕는 일에 열성적이라며 김씨는 은근히 아내 칭찬을 늘어놓는다. 31세 늦은 나이에 지인의 소개로 만났는데, 첫 데이트 날 커피숍으로 들어서는 아내를 보며 ‘이 사람과 결혼하겠다’고 결심했단다. 아내와 다섯 번째 만난 것이 결혼식장이었다고 하니 그 뜨거웠던 사랑의 온도를 가늠할 만하다.

결혼 당시 돈 한푼 없는 그에게 아내의 할머니께서 양복을 지어 입으라고 50만 원을 쥐여 줬다. 그는 이 돈마저 경마장 가서 다 날려 먹었다. 군 부대에 공사 일로 들어간 자신 대신 결혼식 준비를 혼자 묵묵히 해내던 아내였다. 철없고 가난했던 신혼 때부터 한 가정의 의젓한 가장이 되기까지 그를 묵묵히 지원해 준 것은 아내의 믿음과 사랑이었다.

없는 살림에 남을 돕는다고 바가지를 긁을 법도 한데 아내는 단 한 번도 싫은 소리 없이 따라 주었다. 오히려 남편보다 앞장서서 나설 때가 많다고. 그런 아내를 가리켜 김씨는 “사랑이 많아 남에 대한 연민이 넘치는 사람”이라고 말한다.

아버지가 가정에서 소외되는 일이 많은 요즘 세태에서 김씨는 아이들과 친한 보기 드문 아빠다. 초등학교에 다니는 두 딸과 같이 공기놀이를 하며 놀아줄 정도다. 두부장수라는 직업을 아이들이 창피해 할까 마음 졸였지만 한낱 기우였나보다. 아이들은 가끔 트럭 옆좌석에 올라타 아빠의 장삿길에 따라나서기도 한다.

“한창 주식 할 적에는 집에 있어도 뉴스에 나오는 주가 보느라 애들은 쳐다도 안 봤어요. 지금은 제가 집에 가는 동시에 TV·컴퓨터 다 끄고 온 가족이 같이 이야기하는 시간을 가져요.”

경제적으로 재기한 것뿐만 아니라 가족 간의 화목도 되찾은 셈이다. 얼마 전에는 아들과 함께 제부도까지 자전거 여행을 다녀왔다는 김씨에게는 한 가지 소망이 있다.

기부하는 것이 몸에 밴 자린고비 아빠

어린 시절 집에서 키우던 말이 죽고 소가 다리가 부러져 집안이 위기에 처했을 때 자기를 품에 안고 논두렁에서 엉엉 울던 아버지. 돌아가신 자신의 아버지처럼 크고 따듯한 품을 가진 아빠가 되는 것. 그런데 집에서는 늘 악역이나 독재자 역을 맡는 등 좀처럼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며 그는 멋쩍게 웃는다.

그는 알고 있을까? 이미 가족에게 좋은 아버지이며, 그가 돕는 많은 사람에게 잠시나마 든든한 아버지 역할을 해 주고 있다는 사실을….

김씨와의 인터뷰 도중 한 소녀가 다가와 복조리를 사 달라고 했다. 결식아동을 돕는 단체에서 나왔다고 했다. 의심 많은 기자가 “어느 단체에서 나왔느냐”고 따져 묻는 사이 김씨는 주섬주섬 지갑에서 5,000원짜리를 꺼냈다. 그는 소녀가 건네는 복조리를 극구 사양하다 결국 받아들어 기자에게 건넸다.
“선물이에요.”

그 선한 웃음이 눈부시다. 조악하게 만든 그 복조리가 기자의 눈에는 세상에서 가장 근사한 선물로 보여 집으로 돌아가는 길 내내 자랑스럽게 꺼내들고 다녔다. 그 안에는 어려운 사람을 생각하는 김씨의 따스한 마음이 들어 있었다.

박미소_월간중앙 기자

매거진 기사 더 많이 보기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