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혜걸객원의학전문기자의우리집주치의] 태아에겐 '씨보다 밭이 중요하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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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3면

다이어트가 영양결핍을 낳고, 영양결핍이 태아 미토콘드리아의 이상을 초래하며, 이것이 장래 태아에게 당뇨를 유발한다는 것이지요. 저는 이번 연구의 의미를 '씨보다 밭이 중요하다'고 요약하고 싶습니다. 아무리 유전자가 훌륭해도 태아가 자라는 자궁 내 환경이 나쁘면 부실한 아기가 태어나기 때문입니다. 자궁 내 환경은 현대의학의 새로운 패러다임으로 떠오르고 있습니다. 당뇨뿐 아니라 고혈압.심장병.암 등 다른 질환에도 영향을 미치기 때문입니다.

흔히 임신 기간을 10개월로 알고 있는 분이 많습니다. 출산이 대개 마지막 생리 날짜부터 40주 후에 일어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잘못 알려진 상식입니다. 알다시피 배란은 생리 후 최소 2주는 지나서야 일어나므로 실제 태아가 자궁 속에 머무르는 기간은 정확하게 38주이며 이는 9개월에 해당합니다. 그러니까 9개월 동안 자궁 내 환경이 태아의 평생 건강을 좌우한다는 뜻이지요. 인체를 자동차에 비유할 때 아무리 설계도(유전자)가 훌륭하고 출고 후 차량관리(생활습관)가 좋아도 공장에서 만들어질 때 차체의 골격 자체(자궁 내 환경)가 엉터리면 금방 고장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태아 건강을 위해 자궁 내 환경을 어떻게 배려해야 할까요.

첫째, 임신을 원하는 가임기 여성이라면 항상 자신의 임신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고 싶습니다. 뇌를 비롯한 태아의 주요 장기는 대부분 임신 3개월 이내 완성되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임신 초기가 태아를 위해 가장 중요한 시기인데 이때 임신 여부를 모르고 과로나 음주.흡연.영양결핍.약물복용은 물론 방사선 검사를 무심코 받는 여성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소변검사나 입덧으로 임신 징후를 알기 전부터 여성은 자궁 내 환경 관리에 들어가야 한다는 점을 명심해야 합니다.

둘째, 자궁 내 환경 관리의 핵심은 '산모의 행복'입니다. 억지 태교는 곤란합니다. 트로트 음악을 좋아하는 여성이 아기에게 좋다고 클래식 음악을 참고 듣는 것은 난센스입니다. 무엇을 하든 산모가 행복할 수 있어야 태아도 편안하게 지냅니다. 산모가 병에 걸려 괴로워한다면 당연히 약물 등을 동원해서라도 적극적으로 치료해야 합니다. 기형 유발이 입증된 약만 아니라면 약물 치료를 두려워할 이유가 없습니다.

다이어트에 매달리기보다 골고루 잘 먹을 수 있게 배려해야 합니다. 부부싸움도 임신 3개월 이전엔 자제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건강한 자녀를 원하신다면 말입니다.

홍혜걸 객원 의학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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