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verStory] "일자리 잃을라" … 머리띠 풀고 판촉 어깨띠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경제 01면

2003년 9월 직장 폐쇄 조치가 내려진 한국네슬레 청주공장(左).한국네슬레 박상대 노조위원장(앞줄 왼쪽에서 셋째) 과 개빈 스타이너 청주 공장장(앞줄 왼쪽에서 넷째)이 10일 청주시 용암동 거리에서 제품 홍보 행사를 하고 있다.

2003년 7월. 한국네슬레 노동조합원 500여 명은 145일간의 길고 긴 파업에 들어갔다. 회사 측의 구조조정에 반발한 것이었다. 회사 측은 노조 파업에 맞서 서울사무소와 청주공장을 직장 폐쇄하는 등 극한 대립으로 치달았다. 지금도 스위스에 있는 네슬레 본사는 이 사태를 '네슬레 사상 최악의 파업'으로 꼽는다. 당시 일부 한국네슬레 노조원은 대형 할인점 등에서 소비자들에게 자기들이 만든 제품을 사지 말라고 권유하기까지 했다.

그로부터 3년3개월이 지난 요즘. 네슬레 노조는 확 변했다. 10일 오후 청주시 용암동 대형 할인점 앞. 쌀쌀한 날씨에 걸음을 재촉하는 행인들을 한국네슬레 박상대(41) 노조위원장이 붙잡았다. 그는 '노사 화합하는 한국 네슬레'라고 적힌 어깨띠를 두르고 네슬레 제품인 커피와 핫초코 등을 권하며 "노사가 힘을 합쳐 좋은 향토기업으로 거듭날 테니 지켜봐 달라"고 부탁했다. 그의 뒤로는 '노사 화합하는 한국 네슬레가 즐거운 설 명절을 기원합니다'라고 적힌 플래카드가 걸려 있었다. 이날 네슬레 홍보에 나선 노조원 40여 명은 모두 2003년의 극한 파업에 참여했던 이들이다. 이날 행사는 노조가 먼저 제안했다. '네슬레=파업'이라는 이미지를 벗고 새출발하자는 취지였다. 박 위원장은 "파업이 끝난 지 오래됐지만 아직도 우리가 파업 중이라거나 공장이 철수했다고 알고 있는 주민들이 많다"고 설명했다. 청주에서의 네슬레 시장 점유율은 전국 꼴찌. 노조에 대한 지역 주민들의 시선이 얼마나 차가운지 알 수 있다.

무엇이 그토록 강경했던 노조를 변하게 했을까. 박 위원장은 우선 직원들 사이에 퍼진 위기의식을 꼽았다. 2003년 파업의 후유증은 컸다. 시장점유율이 확 떨어졌고 3년이 지나도 회복되지 않았다. 해외 수출이 많던 커피류는 파업으로 납품이 제때 이뤄지지 않았다. 그러자 많은 거래처가 떨어져 나갔다. 매년 200억원 내외의 영업이익을 내던 한국네슬레였지만 그해에는 130억원 적자를 봤다. 박 위원장은 "일자리를 잃을 수도 있다는 위기감이 노조와 회사를 한덩이로 뭉치게 했다"고 말했다.

2005년 2월 부임한 스위스인 개빈 스타이너(35) 공장장의 리더십도 굳게 닫혔던 노조원들의 마음을 여는 데 한몫했다. 그는 틈틈이 직원들이 일하는 모습을 카메라에 담았다. 1년간 찍은 사진을 편집해 지난해 시무식에서 상영하고 달력으로 제작했다. 직원들의 변화는 지난해 12월 노조위원장 선거에서 나타났다. '노사 상생'을 공약으로 내건 박 위원장이 당선됐다. 노조 선거 사상 가장 높은 지지율(61%)이었다. 새 노조는 지난달 정기총회에 창사 이래 처음으로 이삼휘 한국네슬레 사장을 초대했다. 회사는 22일 예정된 영업 마케팅 전략 회의에 처음으로 노조 간부를 초청했다.

박현영 기자

◆2003년 파업=회사가 일부 제품 유통망을 아웃소싱(외주) 하면서 인력을 줄이려 하자 노조가 구조조정에 반대하며 파업이 시작됐다. '대가리를 분쇄기에 갈아 마시자'는 섬뜩한 문구까지 등장하기도 했다. 스위스 본사는 한국에 생산공장이 꼭 필요한지 검토하라고 지시했고, 노조는 스위스에 원정 투쟁단을 보내기도 했다. 결국 노사는 양측 대표가 참여하는 '근로조건 및 고용유지위원회'를 설치하기로 하고 협상을 타결했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