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 사람] 하반신 마비 사이클선수 제상정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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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6일 서울 수유동 국립재활원에서 만난 제상정(諸相貞.21)씨는 밝은 표정이었다. 사고로 하반신이 마비된 젊은 여성이라고 보기 힘들 정도였다. 그는 휠체어 바퀴살을 만지작거리며 "나는 바퀴랑 참 인연이 많은 것 같다"며 피식 웃었다.

諸씨는 사이클 선수였다. 중.고교에서 육상 단거리 선수로 활약하다 2001년 부산 남성여고를 졸업하면서 대학에 가지 않고 부산도시가스 사이클팀에 입단했다. 부산 장림시장에서 생선 좌판으로 다섯 남매를 키운 어머니 고기순(47)씨를 도와 귀염둥이 막내 남동생(13)을 훌륭하게 공부시키겠다는 생각에서였다. 諸씨의 부친은 10년 전 뱃일을 하다 사고로 세상을 떠났다.

사이클은 재미있었다. 힘들었지만 도로를 달리다 보면 경치를 즐길 수도 있고, 땀을 흘리면서 언덕을 오르면 편한 내리막이 나오는 인생의 순리도 배울 수 있었다. 그 재미에 그는 바퀴에 몸을 싣고 하루에 최고 1백80㎞를 주파하는 훈련을 소화해 냈다.

하지만 지난 6월 27일 사고가 생겼다. 인천시장배 강화일주 도로경기에서 결승점을 2백50m쯤 남겨둔 곳에서 선도하던 경찰차가 주행로에 멈춰 서버렸다. 선두로 달리던 諸씨는 차를 피했지만 경찰차 운전자가 당황해 차를 다시 움직이면서 추돌했다. 외상이라곤 얼굴과 다리에 작은 찰과상뿐이었지만 척추가 골절되면서 가슴 바로 아래 신경이 끊어졌다. 그때 사고만 당하지 않았더라면 諸씨는 사이클 입문 2년반 만에 처음으로 우승을 차지했을 것이고, 목표대로 국가대표 유니폼과 한국신기록을 손에 쥐었을 것이다.

사고 5개월이 지난 현재 諸씨는 침대에서 휠체어로 옮겨타고 움직일 수 있다. 사고 직후 사이클에 대한 증오 때문에 유니폼과 헬멧 등 사이클 관련 용품을 부숴버리기도 했지만 이제 마음도 추스렸다. 사흘이 멀다 찾아오는 부산도시가스 예권해 감독이 마치 친아버지 같고, 가끔 찾아와 안타까워하는 조희욱 사이클 연맹 회장에게도 감사하고 있다.

諸씨는 휠체어에 완전히 몸이 익으면 휠체어 마라톤이나 휠체어 테니스에 도전해볼 계획이다. 그는 "앞뒤로 있던 바퀴의 배열이 양옆으로 바뀌는 데는 적응해야 하지만 동그란 바퀴를 이용한다는 점에서 자신이 있다"고 말하며 웃었다. 그러다 보면 기적이 일어날는지도 모른단다. 최근 의료계에서는 태아의 줄기세포를 이용해 끊어진 척추신경을 복원하는 실험이 한창이기 때문이다.

글=성호준, 사진=임현동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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