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 건국이후의 권력투쟁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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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스탈린에 밀린 트로츠키 처참한 최후/흐루시초프도 여름휴가중 정변 실각
미하일 고르바초프 소련 대통령이 19일 흑해연안 크림반도에서 여름휴가를 보내던중 보수파정변에 의해 실각한 것은 27년전 흐루시초프가 겪은 경우와 흡사하다.
64년 10월15일 소련관영 타스통신은 흑해연안 크림반도에서 휴가를 보내던 흐루시초프 당 제1서기가 「노령과 건강」을 이유로 당 중앙위에 당제1서기·당중앙위 간부위원·각료회의장(내각총리)사퇴를 요청,이 요구가 받아 들여졌다고 보도했다.
흐루시초프는 그후 연금생활자로 한가한 여생을 보내다 71년 사망했으며 정치무대에 다시는 돌아오지 못했다.
소련의 권력투쟁은 건국직후부터 시작됐다.
혁명의 아버지 블라디미르 레닌은 22년 소 연방성립과 민족문제 처리를 두고 요시프 스탈린과 대립했다. 소 연방에 각공화국이 동등한 권리를 갖도록 하자는 레닌안에 대해 스탈린은 각공화국 및 자치공화국을 러시아공화국이 흡수하도록 하는 자치화안으로 맞섰다.
레닌은 23년 스탈린을 당서기장직에서 해임하도록 지시했으나 그 직후 발작을 일으켜 폐인이 되고,1년후 사망해 권력은 스탈린에게로 넘어갔다.
스탈린은 권력을 잡자 지노비예프·카메네프등과 협력,최대의 정적인 레온 트로츠키를 제거하는데 성공했다. 27년 트로츠키는 소련 공산당에서 제명됐으며,40년 망명지인 멕시코에서 스탈린이 보낸 암살자에 의해 처참한 최후를 맞았다.
스탈린은 이어 「위로부터의 혁명」을 표방,29년 또다른 정적인 니콜라이 부하린을 트로츠키파로 몰아 축출하는데 성공했다.
36년 12월 스탈린은 신헌법공포를 계기로 반대파에 대한 대숙청을 단행했다.
지노비예프·카메네프 등을 「독일게슈타포의 앞잡이」라는 죄목으로 사형에 처한 것을 비롯,수많은 당·정부·군·기업간부들을 독일과 일본 스파이로 처형 또는 강제수용소로 보냈다.
이로써 스탈린은 자신의 개인독재에 기초한 소위 스탈린 주의체제를 완성했다.
53년 스탈린이 사망한후 흐루시초프는 말렌코프·베리아등 라이벌을 물리치고 제1서기에 취임,당의 실권을 장악했다.
흐루시초프는 56년 2월 당대회에서 스탈린의 개인숭배를 공개비판한데 이어,스탈린파인 몰로토프를 실각시키고 58년 불가닌으로부터 총리직을 빼앗아 소련의 명실상부한 최고권력자가 됐다.
그러나 흐루시초프는 농업정책에서 처녀지개간 계획 실패,62년 쿠바사태때 미국에 대한 굴욕적 양보에 불만을 품은 당·관료·군의 반발로 64년 실각하고 만다.
흐루시초프에 이어 브레즈네프­코시긴­포드고르니 3인 집단지도체제가 출범했다.
이중 브레즈네프는 77년 포드고르니로부터 최고회의간부회의장직을 넘겨받고 스탈린시대의 당서기장직을 부활,자신이 취임함으로써 최고권력자로 자리잡았다.
이번 고르바초프의 실각은 지금까지 소련 권력투쟁 패턴에서 볼때 전혀 새로운 면을 가지고 있다. 그것은 바로 군부의 등장이다.
혁명이후 소련은 군에 대한 당의 절대적 우위가 지켜짐으로써 서방세계에서 볼 수 있는 군부 쿠데타는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이 상식이었다.
뿐만아니라 헌법에 의해 합법적으로 선출된 대통령을 무력으로 밀어낸것도 지금까진 없었던 일이다. 지금까지 소련의 권력투쟁은 비록 그 내용은 어떨지 몰라도 형식만은 합법의 요식을 갖췄던 것이다.<정우량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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