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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놈 목소리'와 한국 현대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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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4면

한국에서는 볼 수 없는 일이다. 미국의 대다수 주에서는 반인륜적 살인사건의 공소시효가 없는 반면 한국에서는 범행 후 15년만 지나면 사건 자체가 무효가 되기 때문이다.

요즘 박진표 감독의 '그놈 목소리'가 화제다. 개봉 1주일 만에 180만 명을 끌어들였다. 오늘 서울구치소에서는 기결수 200여 명을 대상으로 한 시사회도 열린다.

'그놈 목소리'는 목적형 영화다. 오직 하나, 공소시효 폐지를 외치며 줄달음친다. 91년 이형호군 유괴 살인사건(2006년 1월 공소시효 만료)을 토대로 "지구 끝까지 쫓아가서 범인을 잡겠다"는 부모의 절규를 담았다.

처음에는 언짢았다. 아이를 잃은 부모의 애끊는 고통, 내가 그 부모였다면 하는 역지사지의 두려움에 공감했으나 공소시효라는 사회적 약속마저 없애자는 영화의 날 선 목소리는 여간 부담스러운 게 아니었다. 감독의 저돌성.선전성에 놀랐다.

생각에 생각을 했다. 반인륜적 범행에 대한 공소시효는 없어져야 마땅한 것인가. 혹시라도 많은 사람을 '영원한 죄인'으로 몰아가는 건 아닌가.

그런데 소득은 딴 데 있었다. 공소시효를 프리즘으로 우리의 어제와 오늘을 읽을 수 있었다. 공소시효를 명문화한 형사소송법이 처음 제정된 건 1954년. 일본법을 따라 사형에 해당하는 범죄에 15년의 공소시효를 두었다. 그리고 지금까지 그 15년이 변함없이 내려오고 있다. 일본에선 그 기간이 2004년 25년으로 연장됐고, 독일.미국 등 많은 국가에선 30년이 넘거나 폐지된 상태다.

서울대 법대 조국 교수의 분석이 흥미로웠다. 그는 한국전쟁 직후 극도의 혼란과 빈곤의 시대, 범죄가 폭증하며 일가친척 중 죄인이 한두 명쯤 있을 법한 당시 상황에서 입법자들이 공소시효를 비교적 짧게 선택했다고 말했다. 일종의 범죄 정리 차원에서 결정한 기간이라는 것이다.

문제는 2007년과 53년 전의 한국이 전혀 다른 나라라는 데 있다. 사회 전반이 비교할 수 없게 안정됐고, 개인의 권익에 대한 관심도 놀랄 만큼 증폭됐다. 당연 흉악한 범죄가 사회에 미치는 충격도 커졌다. 그간 시민단체나 법학계에서 공소시효의 연장을 꾸준히 요구해 왔지만 국회는 거의 꿈쩍도 하지 않았다.

"국회는 정파적 이해가 달린 법률은 신속하게 처리합니다. 대중적 관심이 덜한 사안은 뒤로 밀리게 마련이죠. 의원들에게 별로 남는 게 없거든요. 공소시효 논의도 그 대표적 사례입니다."

조 교수는 피해자의 권리를 주목했다. 권위주의 체제에 억눌려온 한국인은 그간 피의자의 인권개선에 적잖은 노력을 기울였지만 정작 피해 당사자나 그 가족에 대한 배려는 부족했다고 지적했다. 서구에서는 피해자의 입장을 연구하는 '피해자학(victimology)'이 법학의 주요 분과로 정립된 반면 아직 한국에선 "재수 없이 당했다. 각자 알아서 처리해라"식의 상식 아닌 상식이 통용됐다는 것이다. 결국 '그놈 목소리'는 사회의 중심축이 집단에서 개인으로 넘어가는 시대의 징후를 보여주는 셈이다.

때마침 영화제작사가 시민단체와 함께 공소시효 폐기 운동에 나섰다. 시사회에 국회의원도 초청했다. 영화를 띄우려는 마케팅 냄새가 나긴 하지만, 그간 전혀 진전이 없었던 공소시효 논란에 어떤 변화를 몰고 올지 궁금하다.

박정호 문화.스포츠부문 차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