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기고] 나의 선택 나의 패션 49. 샤프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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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1958년 미국 LA에서 열린 미스 유니버스 대회 당시 롱비치에 모여 있는 후보들. 미스코리아 오금순양(左)이 다른 후보들 앞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1958년 어느 날 한국일보사에서 연락이 왔다. 미스 코리아 대회를 주최하고 있던 한국일보사에서는 미국에서 열릴 미스 유니버스 대회에 출연할 그 해 미스 코리아가 입을 의상을 맡아 달라는 부탁을 해왔다. 개회식에 입을 민속 의상과 마지막 콘테스트에 입을 롱 드레스를 비롯해서 행사 기간 동안 입어야 할 모든 의상들을 빠듯한 스케줄에 맞춰 디자인 해 내야 했다.

그 해 선발된 미스 코리아 오금순은 경북 출신의 미녀였다. 그러나 대구 출신의 그 아가씨는 국제적인 대회에 출전할 아무런 준비도 되어 있지 않았다. 나는 그녀에게 걸음걸이부터 무대 매너, 그리고 서양식 식사 예절 등을 틈이 날 때마다 지도했다. 그 소문이 한국일보 창립자였던 고 장기영 사장의 귀에까지 들어가 어느 날 장 사장님이 나를 보자고 했다.

"미스 코리아 사업은 지금 시작 단계에 있습니다. 우리 회사가 주최하는 이번 대회에서 선발된 미스 코리아가 미스 유니버스 본선에 참가하게 되었습니다. 노 여사가 오 양과 함께 가셔서 이것저것 좀 가르쳐 주시며 수고를 해 주시지요. 저희 쪽에서 경비의 반을 부담하겠습니다."

"사장님, 이 사업은 신문사 일이지 제 일이 아닌데요. 게다가 저로서는 살다 온 미국에 가는데 여비를 보태가며 갈 이유가 없지요." 나는 웃으며 대답했다.

명동 사무실로 돌아왔는데 곧바로 한국일보 사업부장이 뒤따라 왔다. "사장님이 다시 모셔 오라고 하십니다." 나는 신문사 차를 타고 한국일보사로 가서 다시 사장실에 들어섰다.

장 사장은 만면에 미소를 지으며 문 쪽으로 걸어 나오시며 "아까는 실례를 했습니다. 이번 유니버스 대회에 노 여사를 정식 샤프론(Chaperone; 사교계의 데뷔를 위한 보호자)으로 위임하고 저희가 모든 비용을 부담하기로 했습니다. 수고 좀 해 주세요"라고 말씀하셨다.

내가 아무리 디자이너로 이름이 알려지기는 했지만 이매리 여사 뒤를 이어 미스 코리아 샤프론으로 결정 된 것은 파격적이라 할 수 있었다.

"사장님, 그러한 중책을 저에게 맡겨 주시겠다고 하신 데에는 감사드립니다만 저는 그 책임을 맡을 수 가 없습니다. 이번에 선발된 오금순 양은 제가 간다 해도 큰 성과를 낼 수가 없을 것입니다."라고 사양했다.

그러나 장 사장은 "노 여사, 걱정 마세요. 금년에는 그곳에 가셔서 보고만 오시면 됩니다. 내년 대회를 위해서 준비해주세요"라고 하셨다. 이래서 거절도 못하고 샤프론이라는 명예직을 수행하게 되었다.

나는 미스 유니버스 대회를 통해서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었다. 우선 일등에 당선 되려면 결점이 없어야 한다는 것이다. 나는 인생에서도 성공하려면 두드러지는 결점이 우선 없어야 한다는 중요한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금순 양은 무사히 행사를 치렀다. 나는 대회 진행에 대해 일일이 사진을 찍고 메모하느라 바빴다. 그러나 한국 여성이 국제대회에서 미모나 몸매로 겨루기는 당분간 어렵다는 생각이 들어 안타까웠다.

노라 ·노 (디자이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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