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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 중독증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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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하이라이트는 광주 경선. '호남의 심장'인 광주는 DJ 직계도, 여론조사 1위 후보도 외면했다. 대신 역발상의 승부사 노무현을 선택했다.

두 번째의 노풍 드라마는 대선을 한 달여 앞두고 방영됐다. 지지율 3위의 노무현이 2위의 정몽준과 단일화에 합의하면서 긴장도는 절정에 달했다. 드라마보다 훨씬 극적인 현실의 짜릿함을 맛본 관객들은 더욱 열광했다. 노무현은 그 힘으로 식상한 '대세론' 연속극을 1년째 끌고 가던 이회창을 무너뜨리고 대선 승리를 거머쥐었다.

역전 드라마는 그 5년 전에도 있었다. DJT(김대중+김종필+박태준) 연합 드라마다. 노풍만큼 극적이지는 않았지만 파괴력이 있었다.

두 번이나 극적 반전에 성공한 여권에 드라마는 '신앙'이 된 듯하다. 여권은 지금 세 번째 드라마를 꿈꾸고 있다.

노 대통령은 신년 기자회견에서 "선거 구도는 바뀔 수 있다"고 자신했다. 그는 "(2002년) 이맘때 지지율 5% 아래 있던 제가 후보가 됐다. 그 뒤 (지지율이) 바닥까지 갔다가 올라왔다 회복된 게 10월 말이다…. 드라마죠"라고 말했다. 노 대통령은 신당파의 탈당을 만류하면서 "대통령의 당적 정리가 (신당의) 조건이라면 내가 당을 나가는 것이 좋은 일 아니겠느냐. 당을 나가 달라면 나가겠다"고 말했다. "사랑하기 때문에 헤어질 수 있다"고 말하는 격이다.

드라마의 향수에 빠져 3탄의 방영을 목 빼고 기다리기는 열린우리당도 마찬가지다. 창당 주역이 "희망이 없다"며 탈당하고, 남은 사람들은 "대통합의 길에서 다시 만나게 될 것"이라고 화답한다. 경쟁 상대인 한나라당 소속 손학규를 주연배우로 스카우트하자는 주장은 나온 지 오래다.

열성 지지자들 역시 "지금은 바닥이지만 결정적 순간에 누가 나와도 나오겠지"라거나 "선거가 지금 구도대로 되지는 않을 것"이라며 드라마를 고대한다. 이쯤 되면 집단 드라마 중독증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당장 눈앞에서 벌어지고 있는 분열과 갈등, 혼란과 진통은 한순간의 극적 반전으로 해결될 수 있다고 믿는 것 같다. 아니 더욱 극적인 반전을 만들기 위한 소품 정도로 여기는 것 같다.

물론 드라마 자체를 문제라고 할 수는 없다. 하지만 여권이 제작 중인 드라마에는 본질적이고 중대한 부분이 빠져 있다. 국민적 환호와 열광 속에 출범한 정권이 5년 만에 왜 이렇게 지리멸렬한 상황에 내몰렸는지에 대한 반성과 고민이 없다는 점이다. 드라마가 가져오는 부정적 측면을 알면서도 눈앞의 이익에 눈이 멀어 이를 외면하고 있는 것이다.

선거판을 뒤흔들어 버릴 '마지막 한 방'에 신경 쓰느라 과연 누가 대통령감이냐, 그의 국가관과 철학.정책은 무엇이냐를 검증하는 데 관심이 없는 것은 더 큰 문제다. 심지어 "후보를 미리 선출하면 흠집만 나게 되고 신선도가 떨어질 게 뻔하지 않으냐"며 대선에 임박해 10~11월께 후보를 뽑자는 얘기까지 나온다. 정권에 눈이 멀어도 보통 먼 게 아니다.

지도자를 잘못 선택해 퇴락과 빈곤의 나락에 굴러 떨어진 나라의 사례는 셀 수 없을 정도다. 굳이 다른 나라에서 사례를 찾을 것도 없지만 말이다.

이정민 정치부문 차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