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억 車' 남산 비탈길도 씽씽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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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8면

현금 50억원 무게의 종이를 실은 다이너스티 승용차는 남산 고개에서도 너끈히 굴러갔다.

"현대가 2백억원을 40억~50억원씩 4~5차례에 걸쳐 승용차로 운반해 권노갑 전 민주당 고문 측에 전달했다"는 공소 사실을 의심하는 權씨 변호인 측의 주장에 따라 21일 실시된 현장 검증은 검찰의 완승으로 끝났다.

서울지법 형사3단독 황한식 부장판사는 오전 10시 법원 근처 은행에서 현금 5억원을 빌려 준비한 종이 상자에 2억원과 3억원을 나눠 넣고 무게를 쟀다. 계측 결과 2억원짜리 종이 상자는 23.2kg, 3억원짜리는 34.7kg이 나갔다.

재판부는 다음으로 복사용지를 이용해 2억원짜리 가짜 돈상자를 30개, 3억원짜리 15개를 각각 만들었다. 현금 강탈 사고가 잦은 상황에서 현금 50억원을 모두 마련하기가 쉽지 않았던 탓이다.

라면박스와 사과박스 크기의 상자는 특별히 주문 제작했고, 무게를 재는 전자계측기도 저울업체에서 빌렸다. 현금을 나르는 데 이용됐다는 다이너스티 리무진은 판매가 중단돼 현대상선 측에 요청해 어렵게 임원이 타던 다이너스티를 협조받았다.

오후 2시30분터 시작된 첫 실험은 2억원짜리 상자 14개와 3억원짜리 4개 등 40억원어치를 차에 싣는 것. 예상보다 쉽게 18개의 상자가 승용차 안에 들어갔다.

다이너스티는 시속 40~50km의 속도로 법원 주변을 15분 만에 완주하는 데 성공했다. 이후 10여차례에 걸쳐 50억원까지 돈 상자를 실어본 결과 별 문제가 없었다. 2억원짜리 상자 14개, 3억원짜리 상자 6개 등 46억원어치를 운반하는 두 번째 주행 실험 때도 승용차는 가볍게 움직였다.

변호인단은 "검찰이 주장하는 돈 전달 경로처럼 가파른 남산 고개를 넘어봐야 한다"고 주장했다. 법원은 이를 받아들여 2억원짜리 상자 25개를 싣고 오후 5시쯤 법원을 출발, 남산 소월길을 따라 하얏트 호텔로 이어지는 언덕길을 오르는 세번째 주행 실험을 했다. 하지만 차는 5백75㎏의 종이 상자를 싣고도 역시 여유있게 가파른 고개를 넘었다.

법원으로 돌아온 일행은 변호인 측의 요청에 따라 두 사람이 상자를 옮겨 싣는 데 걸리는 시간을 측정했다. 50억원은 불과 4분여 만에 다른 차량으로 옮겨졌다.

긴장 속에 검증을 지켜본 검찰 측은 미소를 지었다. 변호인 측은 난감한 표정을 지으면서도 "돈이 오갔다는 압구정동 뒷길에 대한 추가 현장검증을 요청할 방침"이라고 밝혔다.

김현경 기자

사진=김춘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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