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 포럼] '머리 뚜껑' 열리게 하는 사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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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5면

요즘 '머리 뚜껑'이 열리는 일이 잦아졌다. 세월이 흐르고 시대가 달라져도 아랑곳하지 않고, 각자의 배움의 깊이나 이해의 폭과도 상관없는 채 반복되는 고질병들 때문이다.

#1. 회사 앞 U턴 지점에서 직진 차량들의 흐름을 지켜보며 순서를 기다리고 있던 참. 느닷없이 뒤에서 나타난 차가 왼쪽 옆을 파고들며 새치기를 했다. 그리고 잠시 후 우회전하는 나를 다시 왼쪽에서 들이닥쳐 앞지르는 게 아닌가. 사고가 날 뻔했는데도 미안하다는 표시도 없이 뻔뻔하게 질주하는 렉서스 RV차량의 번호판을 보는 순간 화가 치밀어 오르며 내뱉은 말. "이거, 강남차잖아!"

그리곤 섬뜩해졌다. 집요한 강남 죽이기에 강남주민인 나까지 세뇌돼 개인의 잘못에 '강남'의 미움을 얹을 지경이니 하물며 다른 사람들이야 오죽하랴.

강대국의 기세 싸움으로 남과 북으로 갈려 반토막난 나라에서 선거 때만 되면 동서로 나뉘는 것도 모자라 사사건건 서울과 지방이 갈리더니 이제 다시 서울에서도 강남과 강북으로, 강남에서도 대치동과 여타지역으로, 대치 지역에서도 타워팰리스와 기타 아파트로 쪼개지며 으르렁대고 있다. 지긋지긋한 분열의 늪.

#2. 한 독자가 전화로 거칠게 항의했다. 한 여성 필진을 지목해 약사인 남자와 놀아나고 있다며 왜 글을 쓰게 하느냐는 것이다. 껄끄러움을 무릅쓰고 이를 전하자 필진은 어이가 없다는 듯 웃으며 말했다. "제가 해명해야 하는 건가요? 물론 아니죠. 사귀는 사람도 수년 동안 없는 걸요." 그는 미안해 하는 나를 오히려 달랬다. 사회에 발을 내디딘 이후 이런 식의 음해가 비일비재했다고. 심지어 파트론이 있어 뒤를 봐주는 게 아니냐며 낯선 이들로부터 소문의 진위를 다그치는 모욕을 당하기도 했다는 것이다.

"그간 이런 루머와 음해로 시달린 것을 모으면 책 한 권은 될 거예요. 사회에서 활동하는 미혼 여성.이혼 여성에 대한 이상한 시선이 우리 사회에 있어요. 언젠가 이런 얘기들을 묶어 책을 내야겠어요."

남자의 힘이 없다면 결코 사회에서 성공할 수 없으리라는 망상. 거기에 여성이라면 당연히 성을 무기로 했으리라는 지레짐작들로 사회에 명함을 내민 여성들은 피곤하다. 여성의 홀로서기를 가로막는 끈질긴 동물적 편견.

#3. 최근 한 석간신문에 예장합동 측 총회장 임태득 목사가 총신대학교 채플시간에 한 발언이 실렸다. 전교생 8백여명이 모인 자리에서 한 말이다.

"우리 교단에서 여자가 목사 안수를 받는다는 것은 턱도 없다. 여자가 기저귀차고 어디 강단을 올라와!"

오, 하느님! 저희를 시험에 들지 않게 하옵소서. 기저귀라니요? 총신대에서 목사를 꿈꾸며 배움의 길을 걷고 있는 많은 여학생이 설마 대소변을 못 가리는 영유아들인 것은 아니겠지요? 기독교인이 아닌 저로서는 하느님의 말씀을 적은 성경을 공부한 적이 없는지라 성경에 여자는 목사가 될 수 없다고 했는지, 아닌지 모르옵니다. 그러나 성당부설 유치원을 다닌 어린 시절부터 저는 성모 마리아를 흠모했사오며, 비교도의 상식으로 지금까지 성모 마리아의 위대함이 예수를 잉태하신 것에 있다고 믿어왔습니다. 하온데 자연의 섭리로 여성의 몸이 어머니가 되는 준비를 하는 것이 하느님의 예단을 더럽히는 불경스러운 일이 되는 걸까요?

하느님, 제발 어리석은 제 기도에 응답을 해주세요. 지겹고 역겨운 세속의 인간사로 부글부글 끓는 제 머리를 불쌍히 여기시어, 하느님의 세계에서만이라도 '머리 뚜껑'이 열리지 않게요. 아멘.

홍은희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