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 세상] 디지털방송 전송방식 선정 소모전 끝내고 이젠 결론내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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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3면

디지털방송 전송방식을 결정하기 위한 '신사유람단'이 해외시찰길에 오른다. 이들은 총 18명으로 정보통신부.방송위원회를 포함, KBS.MBC.SBS.언론노조.방송기술계.산업계.학계 인사로 구성돼 있다. 시찰단은 22일부터 다음달 16일까지 미국.영국.독일.일본.싱가포르 등 9개국의 정부기관과 방송사를 방문한다. 미국식이 우수한지 유럽식이 우수한지를 현장 검증하겠다는 것이다.

세계화 시대에 외국의 선진 문물과 제도를 보고 배우겠다는 데 시비를 걸 사람은 없다. 그러나 이번 시찰단에 문제가 없는지는 따져봐야 한다. 수억원의 국민 세금을 쓰기 때문이다. 먼저 방문 국가와 시찰 방식이 문제가 될 수 있다. 미국식과 유럽식을 채택하고 있는 대표적인 각 두 나라 정도만 방문해도 우열을 가늠할 수 있다. 그 많은 인원이, 그 많은 나라를, 그 긴 일정으로 방문하는 것이 적합한지 의문이다. 양측 대표 몇명이 국가를 나눠 시찰하는 방식이 효과적일 수 있다. 이라크 파병을 위한 정부조사단의 규모도 12명이었는데 디지털방송 전송방식을 고르기 위해 그만한 수고를 하는 것이 정당한가.

시찰단의 구성 방식도 문제다. 방송위와 MBC 소속이 각 3명이나 포함돼 있다. 지역 민방이나 케이블방송 소속은 참여하면 안 되는가. 공동단장으로 정통부에서는 정보보호진흥원 원장이, 방송위에선 부위원장이 참여한 것도 균형이 맞지 않아 보인다. 외국인들이 한국 고위 인사들이 '떼'지어 다니는 것을 어떻게 볼 지도 궁금하다.

더 큰 문제는 이번 조사단처럼 조합주의로 구성해서 통일된 결론이 나올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고화질(HD) 방송에 대한 정의 등 여러 사안에 관해 이미 확고한 의견 차가 있는 인사들을 산술적으로 결합했기 때문이다. 이 같은 사례는 1999년 방송법 제정 과정에서도 잘 보여주었다. 이번 조사단은 방송 정책의 주도권을 둘러싸고 양측이 서로 신뢰하지 못하고, 자기 눈으로 직접 확인해야만 직성이 풀린다고 고집하면 시찰 결과는 뻔하다.

이미 정부가 1997년 디지털 전송방식 결정을 위해 위원회를 구성했고, 수많은 조사.연구 결과를 토대로 미국식 디지털 전송방식을 결정했다. 그럼에도 찬반 세미나와 시위가 잇따랐다. 결국 정부는 여론에 떠밀려 다시 검토 중이다.

방송과 관련된 정책이면 왜 이렇게 소모적이고, 낭비적인 투쟁을 벌일까. 방송의 중요성 때문일 수도 있지만 우선적으로는 정부의 무책임, 부처와 방송사의 집단 이기주의에서 그 원인을 찾을 수 있다. 국민의 방송을 부처의 방송 혹은 자사의 방송으로 이해하는 것은 아닌지. 학자들도 비판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객관적인 연구와 공정한 주장보다는 어느 편에 서서 프로젝트를 수행하고, 목소리를 높이지는 않았는지.

미국식과 유럽식을 주장하는 양쪽의 싸움은 점입가경이다. 사실 확인이나 진실 파헤치기에는 관심이 적고 이미 목표를 정해놓고 가고 있는 것 같다. 그러나 국민들은 지금 진실을 알고 싶어 한다. 조사단은 국가와 국민의 이익이 무엇인지를 먼저 염두에 두고 시찰해야 한다. 또 시찰 후 고화질과 이동 수신 등 쟁점에 대해 미디어 경제학과 시청자 관점에서 분명히 비교 우위를 밝혀야 할 것이다. 이를 통해 지난 5년간의 소모적 논쟁을 종식시키길 기대해본다.

김택환 미디어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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