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아이] 韓美동맹의 진혼곡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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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미동맹은 죽었다. 아니 죽음을 앞두고 있다. 정부 관리들이 걸핏하면 한.미관계 이상 없다고 외쳐대는 것만 봐도 분명 병은 중증이다. 오히려 상황을 부인하고 덮으려는 자세가 문제다. 현실 인식이 부족하거나 알고도 모른 척 넘기려는 것이다. 어느 경우든 상황이 나아지길 바랄 수는 없다. 따져보면 동맹에 금이 가기 시작한 건 벌써 오래 전부터다.

무슨 까닭일까. 우선 우리가 달라졌다. 민주화를 우리 손으로 이뤄냈다. 그래서 정권의 정통성을 놓고 미국에 아양떨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했다. 또 대미 무역흑자 탓에 한때 시장개방 압력에 시달렸건만 어느덧 적자로 돌아선 지도 오래다. 미국시장에 파고들려고 자존심 죽일 필요가 없어졌다. 게다가 1997년 말 외환위기를 겪으며 미국에 매달렸던 기억도 우리 머릿속에서 사라졌다.

좀더 비근한 예로 우리 국민은 미국에 빚진 일 없는 이를 대통령으로 뽑았다. 그래서 미국마저 긴장했다. 또 미국에 대해 노(No)라고 말할 수 있는 참모들을 청와대 주변에 심었다. 이라크 추가 파병을 놓고 이토록 소란피우지 않아도 될 일을 이 지경으로 만든 이유이기도 하다. 하지만 그들을 비난할 생각은 없다. 자신이 살아온 배경이 그랬고 또 지난날 미국을 상대하던 선배들의 비굴함을 보며 분개했던 이들이기 때문이다.

우리만 달라진 게 아니다. 미국도 옛날의 미국이 아니다. 특히 9.11 테러 이후 사회 전체가 멍들었다. 히스테리도 늘었다. 대국의 아량은 더 이상 기대할 수 없다. 또 유일 초강국의 지위를 어떻게든 지켜내야 한다는 강박감에 사로잡혀 있다. 대통령 주변의 네오콘(신보수주의자)은 접어두더라도 조지 W 부시 대통령 자신이 우리 기억 속의 미국 지도자들과는 사뭇 다르다. 난봉꾼에서 독실한 기독교인으로 새로 태어난 그는 세상 만사를 흑백으로 본다. 그래서 북한의 체제안전을 보장할 수 있다는 부시의 말 한마디에 우리가 환호했지만 그의 가슴 속에 있는 북한 지도자는 '악의 축'의 두목일 뿐이다. (이라크의 사담 후세인과 전혀 다를 바 없다는 게 부시의 생각이다.) 마지못해 북한을 대화의 상대로 받아들일 수는 있을지언정 함께 공존할 생각은 애초부터 없는 미국이다.

말이 나왔으니 북한의 존재 또한 한.미동맹이 죽어가는데 무시못할 원인 제공자다. 특히 보듬어야 할 대상으로 북한을 규정하고 미국을 달래가며 우리에게 동참하길 촉구했던 탓에 동맹은 안에서 곪아들기 시작했다. 북한이 적(敵)이 아니라면 동맹은 과연 무엇에 쓸꼬. 북한을 보는 우리 시각이 굳어질수록, 그리고 대북 포용정책이 일관성 있게(?) 추진될수록 미국은 구조적으로 우리 마음에서 멀어져 갈 수밖에 없다. 또 북한의 군사위협을 미국이 들먹일수록 우리에게 비춰지는 미국은 동족화해에 걸림돌일 뿐이다. 그래서 나는 남북화해와 협력정신에 투철한 대통령 참모들의 미국 보는 눈이 싸늘한 이유를 이해한다. 기분 같아선 민족공조도 건지고 여러 모로 쓸모있는 동맹도 포기하지 않는 세련미를 기대하고 싶지만 그건 아무래도 무리다. 그만큼 미국은 우리에게뿐 아니라 전 세계 도처에서 인기없는 나라가 돼버렸다.

그나마 몇 안 되는 워싱턴의 '코리아 워처'들이 기진맥진해 있듯이 나도 이젠 미국 얘길랑 접어야 할 모양이다. 동맹은 더 이상 복원의 대상이 아니다. 죽음의 순간을 늦추는 일만 남았을 뿐이다. 죽은 자의 혼을 위로하는 레퀴엠(진혼곡)이 한.미동맹에는 다소 이른 감이 있을지 모른다. 하지만 살아있는 자가 자신의 부고(訃告)를 미리 써보며 남은 삶의 자세를 가다듬듯 동맹을 보는 울적한 기분에 푸념을 늘어놓았다.
길정우 통일문화연구소장 겸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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