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60)제85화 나의 친구 김영주(45)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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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9면

<애국과 매국>
다이나마이트가 노벨 평화상 기금이 되는 판이지만 아무리 임시정부가 궁했던들 조국을 배반한 친일 군납업자의 깨끗지 못한 돈을 독립자금으로 받았겠는가.
그런데도 손창식은 독립자금으로 헌납했다는 증빙서류를 부득부득 우리에게 들이미는 것이었다.
돈을 받아간 정항범이라는 이름도 필자가 보고자 해서 본 것이 아니었다. 바로 코밑에 들이미는 그 서류를 걷어치우려는 데 순간적으로 내 눈에 띄었던 것이다.
우리는 그런 증빙서류나 보자고 찾아간 것은 아니었다. 애당초 그런 뻔뻔스런 자와는 거룩한 윤 의사의 동상 얘기를 해서는 안 되는 것인데 그것을 왜 깨닫지 못했던가. 그것은 우리의 큰 잘못이었다.
나는 김영주의 소매를 끌면서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그때 손은 김영주에게 돈 한 뭉치를 안겨주었으나 김은 받지 않았다. 그래도 따라오면서 떠맡기는 돈 뭉치를 김영주는 잔디밭에 팽개쳐 버렸다.
지폐가 바람에 날려 여기저기 흩어지면서 파란 잔디 위를 굴러다니는 것이 아주 인상적이었다.
뒤에 알게된 일이지만 8·15후에 손을 찾아가 민족반역자니 뭐니 협박하며 각양각색의 조선사람·중국사람들이 돈을 뜯어갔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는 자주 거처를 옮겨 다녀야 했고 재산을 보호하기 위해 영국인의 양자가 되었다는 풍문도 있었다.
처음에 손이나 그의 장모는 우리들 역시 그런 사람으로 보았을 것이다. 그러나 윤 의사 의거 현장에 말뚝 하나라도 표식하고 싶어하는 우리를 보고, 그리고 돈 뭉치를 팽개치는 우리를 보고 그들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
나는 지금도 가끔 그날을 회상한다. 우리들이 아직 때묻지 않은 맑은 시절이었다. 김영주도 그날을 잊지 못 할 것이다.
손과는 그렇게 헤어졌고 윤 의사 동상도 환상으로 끝이 났다. 그러나 홍구 공원에는 어느 때 누구에 의해서건 간에 반드시 윤 의사 동상이 세워져야 된다고 굳게 다짐했던 것이다.
오늘은 전회에서 약속한대로 손창식으로부터 군자금 10만 달러를 받아 간 정항범이 그후 어찌됐는지를 『남기고 싶은 이야기』니 만큼 약술하자.
어느 날 부친을 따라서 20년 전 상해에 와 살고 있는 이철 선생과 우리 일행(박창수. 김영주·문기찬·필자)은 석양이 비추는 중국반점에 자리를 잡고 있었다.
그날 이철 선생이 들려준 정항범 스토리는 점입가경. 우리들은 배갈을 마시면서 열심히 귀를 기울였다. 그가 들려준 이야기는 이러했다.
1944년 가을 어느 날 상해에 영국 캠브리지 대학에서 공부했다는 신사 한 분이 홀연히 나타났는데 그가 바로 정항범이었다. 그는 일거리를 찾아 온 것이다. 소문대로 손창식이 과연 돈이 많다는 것을 그는 확인했다.
그는 손창식이 전에 일본 특무기관 대좌 (대령) 의 여동생과 결혼하여 일본은행 융자로 군수공장을 지었다는 것도 알아냈으며 그후 한국인 여비서 조동선과 결혼한 것도 알게됐다.
조동선의 부친은 독립운동가이자 목사인 조상섭이었다. 정항범은 손창식의 내밀을 광범위하게 조사한 후 조심스럽게 그에게 접근했다. 그는 손에게 『일본은 곧 망한다. 일본과 동맹국인 이탈리아는 이미 망했고 연합군의 총공세로 독일 또한 시간문제가 아닌가. 그 다음이 일본 차례라는 것은 너무도 뻔하지 않은가. 더 늦기 전에 수를 쓰라』는 것이었다.
영국에서 갓 돌아왔기 때문에 국제정세에 밝은 사람의 말이었으니 감이 빠른 손의 마음이 동할 수밖에 없었다.
『수를 쓰라니 어떻게 하라는 겁니까?』
『중경 임시정부에 하루속히 손을 대시오』
『나는 이미 친일파로 소문이 나있고 임시정부에서는 나를 민족반역자로 몰고 있는데 어떻게 임정에 손을 댄단 말입니까.』
『손 선생이 결심만 한다면 내가 돕겠소. 다음에 또 만납시다.』
손창식은 떠나려는 정항범에게 사정했다. 서로 연락이 편리하도록 일류호텔을 정하겠으니 거기에 유해달라는 것이었다.
손과 정은 만난 그날로 같은 배를 탄 것이다.
「신념무적」이라는 말이 있다. 병든 신념이 오늘날까지도 우리사회를 좀먹고 있지만 비뚤어진 신념이나마 「신념무적」은 당시 손과 정에게도 있었다.
정항범이 10만 달러를 가지고 중경 임시정부에 나타난 것은 1944년 10월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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