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죽음준비 모임(분수대)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3면

하나밖에 없는 아들을 잃은 한 여인이 부처에게 죽은 아들을 살려낼 방도를 물었다. 부처는 대답대신 사람이 하나도 죽은 일이 없는 집을 찾아서 겨자씨 한줌을 얻어오라고 말했다. 여인은 부처의 말을 따르느라 헤매다니면서 스스로 죽음의 의미를 깨우쳤다고 한다. 이세상에 죽지않는 생명체는 없다.
사람들은 죽음의 공포를 극복하는 지혜로 내세라는 것을 생각해냈다. 불교에서는 현세의 삶은 한낱 덧없는 찰나에 불과할뿐 인연에 따라 윤회전생 하는 실재의 거대한 흐름은 불멸하는 것이며 이 불멸의 깨달음을 열반이라 한다.
기독교에서는 인간의 육신은 소멸하나 영혼만은 하늘나라에서 영원불멸한다고 믿는다. 죽음은 고귀한 영혼의 비천한 육신으로부터의 해방이다.
이슬람교의 경전 코란을 보자. 『너희 가운데 누구에게도 죽음의 운명을 지웠으니 이로인해 좌절하지 말라. 그분은 너희의 양상을 바꾸어 너희가 알지못하는 양상으로 다시 창조하시도다.』 여기서 「그분」은 물론 알라신이다. 죽음은 종말이 아니라 새로운 생명양태의 시작이다. 그래서 슬픔이나 공포라기 보다는 기쁨일 수 있다.
우리민족 종교인 증산교의 죽음은 좀 특이하다. 인간계에서 도덕적 실천과 수도를 통해 영력을 기른 사람은 천상에서 영원한 불로불사를 누린다. 그러나 수도를 게을리하고 도덕실천을 안한 사람의 영은 얼마후에 소멸해버린다.
『북소리 둥둥 명을 재촉하는데/뒤돌아보니 해가 기운다/황천에는 여관 하나 없으니/이 밤은 뉘 댁에서 쉴까.』
사육신 성삼문이 처형직전에 남긴 시다. 절명의 순간에 떠오른건 이승의 회한이 아니라 미지의 저승에 대한 불안과 두려움이었다. 죽음에 임한 인간들의 보편적 정서일 것이다.
「삶과 죽음을 생각하는 회」라는 듣기에 좀 생소한 모임이 발족됐다. 죽음에 대한 준비교육을 통해 죽음을 두려워하는 태도에서 벗어나 죽음에 대한 바른인식을 갖춤으로써 진실한 삶을 모색한다는 것이다. 이 모임이 회장 김옥라씨(72)는 『죽음을 준비하는 교육은 곧 참된 삶의 교육』이라고 말한다.
탐욕과 허위의 늪에서 서로 물어뜯고 할퀴며 허우적거리는 세태에서 각자가 자기성찰의 눈을 뜨게하는데 이 모임이 기여할 수 있었으면 좋으련만­.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