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혜걸객원의학전문기자의우리집주치의] 통증, 미련하게 참나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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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척추동물은 통증을 느낍니다. 그리고 무척추동물 가운데서는 유일하게 문어가 통증을 느끼는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실제 영국에선 문어를 대상으로 고통을 가하는 실험은 법으로 금지하고 있을 정도입니다.

통증은 고등생물일수록 강하게 느낍니다. 인간이 통증에 가장 예민한 개체란 뜻입니다. 통증은 진화론적으로 설명합니다. 즉 통증을 느끼는 개체가 그렇지 않은 개체보다 생존에 유리했다는 것입니다. 몸에 상처가 생겼는데 통증을 못 느낀다면 상처가 더욱 심해져 생명을 잃게 되기 때문입니다. 대표적 사례가 당뇨 발입니다. 당뇨 합병증으로 신경이 손상돼 통증을 느끼지 못할 경우 발이 썩어도 모르게 됩니다.

그러나 진화론은 완벽하지 않은 법입니다. 통증도 지나치면 통증 자체가 질병을 초래하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허리가 삐끗했다고 가정해 보지요. 척추 근육이 찢어지거나 인대가 늘어난 염좌입니다. 디스크나 골절처럼 후유증이 남는 심각한 질병은 아닙니다만 대단히 아픕니다. 자리에 꼼짝하지 않고 누워 있어야 하며 조금만 움직여도 허리가 끊어질 듯 아프지요. 이렇게 아파야만 가만히 누워 휴식을 취하게 되고, 이를 통해 상처가 나을 수 있습니다. 여기까진 통증의 고마운 역할입니다.

문제는 이러한 통증을 무조건 참아야 하는가란 점입니다. 보수적인 의사일수록 통증 치료에 인색한 편입니다. 이유는 여러 가지입니다. 가능하면 약을 쓰지 않고 낫는 것이 좋다거나 아니면 정확한 진단을 위해 통증을 감수해야한다는 이유를 듭니다.

그러나 최근 의학계 추세는 통증을 보다 적극적으로 치료하자는 쪽으로 확연히 기울고 있습니다. 진단만 내려진다면 구태여 환자가 통증을 참아야 할 이유는 없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통증은 그 자체가 염증을 유발하며 근육을 경직시켜 질병을 악화시킵니다. 아울러 통증이 오래 지속되면 신경 자체에 변성이 일어나 나중엔 통증의 원인이 사라져도 통증이 계속되는 악성 통증을 낳게 됩니다.

아플 때 진통소염제를 아낄 이유는 없습니다. 일반적인 진통소염제로도 통증이 조절되지 않는다면 마약성 진통제라도 주저할 이유가 없다고 봅니다. 많은 사람이, 심지어 일부 의사도 중독 등을 이유로 마약성 진통제를 꺼립니다. 그러나 이것은 잘못입니다. 통증 환자가 치료 목적으로 마약을 투여할 경우 중독될 확률은 1만2000명 중 1명꼴로 극히 드물게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암환자의 경우 보통 사람에게 중독을 일으키는 양의 100배 많은 모르핀을 한꺼번에 사용해도 중독이 생기지 않는다는 보고도 있습니다. 현대의학은 약물과 수술 등 다양한 통증치료 기술을 이미 갖고 있습니다. 말기 암환자의 통증이든, 요추염좌에서 비롯된 통증이든 통증은 종류를 불문하고 초기부터 적극적으로 치료하는 것이 옳습니다. 환자는 통증에서 벗어날 권리가 있으며, 의사는 통증을 치료할 의무가 있습니다. 통증에 관한 한 참는 것이 능사가 아닙니다.

홍혜걸 객원 의학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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